세계최강을 자랑하던 일본 가전업계가 흔들리고 있다.

세계가전업계에 몰아닥친 "디지털화"의 물결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PC와 인터넷산업이 급속히 팽창되면서 디지털방식의 기술이 훨씬 앞선
미국 가전업체들에게 선두자리를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뒤늦게 디지털의 중요성을 깨달은 일본가전업체들이 PC산업에 직접 뛰어
들고 있으나 "세계최강" 자리를 지켜 나갈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컴퓨터산업과 가전제품은 그동안 각각 디지털방식과 아날로그방식으로
분야가 각각 구별돼 따로 발전해 왔다.

"가전=아날로그" 등식이 성립되던 시절엔 막강한 아날로그 기술을 갖고
있던 일본업체를 따라잡을 데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 92년부터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디지털방식인 음악 컴팩트디스크(CD)가 등장하면서 부터다.

CD가 다시 CD롬으로 발전하는등 디지털제품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비디오의
경우 이제 대부분 디지털로 대체돼 가고 있다.

CD 한장 크기에 두시간짜리 영화 한 편을 수록할수 있는 디지털비디오
디스크(DVD)가 나오고 TV나 컴퓨터로도 사진을 볼수 있는 디지털 스틸
카메라까지도 일반 소비자들에 친밀해졌을 정도다.

컴퓨터를 통해 디지털 AV를 조종하거나 디지털 캠코더에서 뽑은 영화필름을
쉽게 편집할 수 있게 됐음은 물론이다.

이같은 가전제품의 디지털화는 그러나 기존의 아날로그 상품들에 치명타를
가했다.

예컨대 아날로그 오디오는 2백달러짜리와 1천달러짜리 제품간에 커다란
음질차이가 났으나 디지털기술을 이용하는 CD의 경우 일반인들은 제품
차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결국 아날로그제품 중심의 가전업체들은 디지털에 대항하기 위해 가격인하
경쟁에 나설 수 밖에 없게되고 "몰락"은 예정된 길이었다.

일본 산스이전기와 아카이전기가 홍콩기업인 세미테크사에 인수되고
켄우드사와 파이어니어전기가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도 이 때문이다.

자존심이 강한 일본기업들이 DVD기기를 팔기 위해 할리우드의 영화사와
미국 PC제조업체들에게 "DVD플레이어를 이용해 소프트웨어를 불법적으로
복제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는 수모까지 당한 일본기업들은 요즘 가전
제품의 수성을 위해 PC사업에 뛰어드는등 컴퓨터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소니가 독자적인 PC를 선보였고 그동안 노트북컴퓨터만 만들던 도시바도
AV기능이 강화된 데스크톱 컴퓨터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디지털시대의 승리자는 최종조립자가 아닌 반도체등 디지털기술이 요구
되는 부품제조업자"라는 말이 강조되는 것도 이런 흐름을 잘 보여 준다.

< 이창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