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타이베이 그랜드하얏트호텔 대연회장에서 열린 에이서
창립20주년 기념만찬장은 마치 인종전시회를 방불케했다.

만찬장의 2,000여 축하객들은 세계 각지의 100여개국에서 모인
에이서그룹 자회사및 협력업체 판매대리점 등의 관계자들.

이들의 다양한 국적분포로 보면 에이서는 세계화된 기업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말과 피부는 다르지만 대만 최대이자 세계 7대컴퓨터회사인
에이서를 매개로 이날만은 한가족이 됐다.

각지역 우수딜러에 대한 시상식으로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은 뒤
일후지쓰 대만법인의 사토 유키노 사장이 축하연사로 등장, 에이서의
영문 4글자를 이렇게 풀이했다.

"A는 Action(행동), C는 Change(변화), E는 Energy(정력), R는 Revolution
(개혁)" 하객들로부터 우뢰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경쟁업체 사장의 뛰어난 수사학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뜻풀이 그 자체에
대한 동의의 표시였다.

실제로 에이서가 지난 20년동안 성장해온 과정을 돌아보면 이 4단어가
지닌 의미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76년 5명의 겁없는 대만청년들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2만5,000달러를
빌려 설립한 회사가 20년만에 전세계 38개국에 종업원 1만5,000여명을
거느리며 연간매출 58억달러(95회계연도)를 올리는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에이서제품들이 세계시장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보면 더욱 놀랍다.

"세계PC시장 점유율 7위,컴퓨터모니터 판매량 세계3위, 서버용 중대형
컴퓨터시장 점유율 세계5위, CD롬구동장치 생산순위 세계5위" 에이서그룹은
특히 지난 3년동안 세계컴퓨터업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장기록을
세웠다.

93년에 50%, 94년 70%, 95년에는 80%의 매출증가율을 달성했다.

미국의 컴퓨터시장전문 조사회사인 IDC는 최근 2000년이면 에이서가
미휴렛팩커드에 이어 세계2위의 PC업체에 올라설 것으로 예측했다.

에이서의 2000년 매출목표는 150억달러.

앞으로 4년후 지금보다 외형이 4배 가까이 확대된 큰 기업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우선 주력제품인 PC및 PC부품에선 시장평균신장률보다 5~10%포인트 높은
25%선의 매출증가율을 매년 꾸준히 유지하고, 컴퓨터와 가전제품의 영역을
결합한 새로운 차원의 인텔리전트 가전제품시장에 뛰어들어 30억달러이상의
판매고를 거두겠다는게 에이서 청사진의 뼈대다.

에이서는 앞으로 사무실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컴퓨터와 일반가전제품의
경계가 무너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인텔리전트 가전제품을 두고 하는 얘기다.

누구나 쉽게 다룰 수 있으면서도 기존PC기능과 함께 오디오 비디오(AV)
기능과 전화기 게임기 기능까지 갖춘 제품이 전세계 가정에 보급되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컴퓨터전문업체인 에이서가 최근 고선명TV를 선보이는가 하면 스마트TV
게임기 DVD(디지털비디오디스크)구동장치 등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것도 이런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컴퓨터제조기술에서 파생될 수 있는 신상품에는 모두 손을
대겠다는게 에이서의 기본전략이다.

그러나 에이서의 이런 전략이 순조롭게 먹혀들 것인가에 대해 비관적
시선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기술력과 자본력이 훨씬 뛰어난 후지쓰 컴팩 IBM등 경쟁업체들의
사업방향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에이서는 신규시장을 마치 자신의 독무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 가전제품 판매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브랜드인지도가 낮다는 점도
에이서가 단숨에 해결할 수 없는 난제다.

지금까지 에이서가 급성장한데는 지역및 사업단위별 철저한 분권화와
신속한 물류체계, 저마진-대량판매정책 등이 크게 작용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분야에서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이를 가장 빨리
제품화시켜 세계각지의 소비자들에게 싼 가격으로 공급하는게 에이서의
최대강점이었다.

하지만 PC를 판매할때와 달리 가전판매경쟁에서는 에이서의 이런 강점이
발휘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PC부품의 경우 에이서는 초기부터 자체조달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가전제품은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업체에 보다 많이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이미 가전영역에서는 저마진정책이 보편화되어 있는데 여기에
저가전략으로 덤벼들겠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과 다름없다.

에이서가 소비자들의 욕구변화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게해 결국
판매증가효과를 얻게했던 분권화전략도 이미 한계에 이른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 회사 미국법인 에이서아메리카의 경우 지난해 주력PC 아스파이어의
판매액이 14억달러에 달해 62%의 판매증가율을 기록했다.

세계PC시장의 최대격전지인 미국에서 1년여만에 자리를 굳힌 셈이었다.

아스파이어는 지난해 대부분의 미컴퓨터전문잡지에서 히트상품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에이서아메리카는 아스파이어 판매이익면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지역및 제조품목별로 모두 10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에이서는
분권화를 강화하기위해 현지 사정이 갖춰지기만 하면 각 자회사를
주식분할방식으로 별도법인화할 계획이다.

아시아지역판매를 전담하는 ACI(에이서컴퓨터인터내셔널)는 이미 올봄에
싱가포르증시에 상장되면서 독립했고 에이서아메리카와
에이서라틴아메리카도 내년말까지 같은 방식으로 분할될 예정이다.

따라서 앞으로 각 지역의 에이서자회사들은 대만의 모기업이 아닌 현지
주주들의 입김과 자금으로 움직이게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자력갱생기반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데다 모두 대규모
투자재원이 들어가는 신규사업을 벌이면서 지역단위별로 독립체제를 구축할
경우 적지 않은 어려움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에이서그룹은 대만의 에이서부품, 또 미텍사스인스트루먼트
(TI)와 메모리반도체를 합작 제조하고 있는 TI에이서 두회사에 대한
이익의존도가 너무 높은 까닭이다.

에이서그룹의 스탄쉬회장은 창립20주년 기념식에서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에이서직원들에게 "에이서의 고향은 이제 대만이 아니다.

앞으로 전세계를 에이서의 고향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전세계에 뻗쳐 있는 에이서의 분신들이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적인 뿌리를 내리는 작업을 3단넓이뛰기에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도약으로 비교했다.

< 타이베이=박순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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