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맨과 여행객들이 다니는 곳이면 어디든 날아간다"

지난 26년 설립돼 올 10월로 창업70주년을 맞는 미 노스웨스트항공이
경영난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떠나야 했던 아픈 상처를 씻고 아시아시장으로
다시 권토중래하고 나섰다.

최근 2~3년새 경영이 호전되기 시작한 후 올들어서도 1.4분기에 5,340만
달러라는 사상최대의 순익을 거두는등 안정적 성장궤도에 접어들자 중점
사업지역인 아시아진출을 확대하고 나선 것.

지난 47년 도쿄에 첫 취항함으로써 미국~아시아간을 최초로 운항한
항공사이자 창업이후 줄곧 같은 회사명을 지켜온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항공사인 노스웨스트.

그러나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노스웨스트는 지난 92년엔 파산위기까지
몰리는등 경영압박으로 홍역을 치러야 했다.

당시 걸프전의 영향으로 기름값이 갤런당 60센트에서 1.40달러로 치솟은
반면 항공이용객은 줄었으며 92년엔 항공사간 가격인하경쟁으로 9억7,000만
달러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하면서 부도 일보직전에까지 몰렸던 것.

이에 당시 경영진은 직원들의 급여를 8~12%까지 삭감하고 임금대신 주식을
지급하는가 하면 수익성이 적은 노선을 대폭 감축하면서 기업회생에 나섰다.

여기에 네덜란드의 KLM(93년), 아시아나항공(94년)과 제휴한 코드셰어링
(편명공동사용)이 성공을 거두면서 93년 하반기부터 기업이 흑자로
전환했다.

지난해에는 3억4,000만달러의 순익을 거뒀다.

최근에는 주식값도 상장당시(13달러)보다 크게 오른 50달러선까지
거래되고 있다.

이같은 실적호전과 함께 아시아지역 항공시장의 성장속도가 세계 평균의
2배에 이른다는 점에 주목, 미국~일본간 시장의 최대 항공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나선 것이다.

노스웨스트가 최근 운항편수를 늘리거나 직항로를 개설한 도시들은 서울,
중국 북경 광주, 일본 도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등.

서울~미국노선의 경우 노스웨스트는 지난 5월 서울~디트로이트 노선을
매주 4회로 늘리면서 미국동부의 뉴웍공항까지 연결노선을 확대했다.

이달부터는 서울~도쿄노선도 디트로이트를 경유, 뉴웍공항까지 연결하고
있다.

기존의 뉴욕 JFK공항으로의 매일 논스톱 코드쉐어 서비스를 합할 경우
서울~뉴욕노선은 매주 18회로 증편된 셈이다.

노스웨스트는 JFK공항외에 뉴웍공항을 추가로 운항한데 대해 미국 동부가
한국인들의 발길이 잦고 출장여행이 크게 늘고 있기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게다가 이 지역에는 우수한 교육기관이 집중돼 학생과 학계 종사자들의
방문도 잦다.

노스웨스트는 다음달부터는 미국 항공사로는 처음으로 개설한 시애틀~
자카르타 노선을 주 3회씩 취항하고 미네아폴리스/세인트폴~도쿄간 운항도
성수기인 다음달부터 9월까지 한시적으로 주1회에서 주4회로 증편 운항한다.

또 내년 7월 홍콩의 중국반환에 대비, 로스앤젤레스~상해간 서비스를
로스앤젤레스~광주간으로 바꿔 운항할 계획이다.

노스웨스트는 이밖에 GM 포드 크라이슬러등 디트로이트에 공장이 있는
미 자동차 빅3와 미시건주에 있는 기업체들의 지원을 얻어 미국항공사로는
처음으로 지난 5월부터 주3회씩 디트로이트~북경간 논스톱노선을 취항하고
있다.

오는 98년까지는 중국행 운항횟수도 지금의 두배가 넘는 주 9회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노스웨스트의 북경논스톱취항으로 미국기업들이 거대한 신흥시장인 중국에
손쉽게 진출할수 있게 된 것은 물론이다.

노스웨스트는 이같은 취항증편외에도 이달들어 일본항공시스템(JAS)과
제휴에 나서는등 다각적인 아시아공략계획들을 척척 진행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계획들이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노스웨스트의 내환마저
모두 사라진것은 아니다.

노스웨스트의 의결권주식 19.5%를 소유한 KLM항공이 제휴관계 해소를
위협하면서 최근 노스웨스트의 경영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워시맨 수석부사장은 "경영권 다툼은 운항과는 별개의 문제"라며
"현재 양사는 제휴로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고 말하고는 있다.

그러나 만의 하나 양사의 제휴가 깨질 경우 노스웨스트가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릴 것은 너무나 뻔하다.

노스웨스트가 최근 재개한 아시아를 중심으로한 공격적 경영이 어떤 성과를
거둘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창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6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