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치위스키의 본고장 스코틀랜드가 유럽의 하이테크왕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한 곳이자 한때 자본주의 경제와 산업의
심장부로 꼽혔던 글래스고를 빠져나와 8번 고속도로로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로 가다보면 모토로라, 필립스, NEC, 휴렛팩커드 등 세계적인
전자회사의 공장들을 잇따라 만날수 있다.

이들 첨단기업의 생산기지들은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넓은 목초지와
어우러져 언뜻 보면 산업단지가 아닌 듯한 착각을 준다.

그러나 이곳이 바로 유럽최대의 전자산업단지 "실리콘 글렌"이다.

실리콘 글렌은 스코틀랜드 동부의 해딩턴시에서 서쪽 맞은편 끝인
그리녹시까지 약150km에 걸쳐 형성되어 있는 전자산업단지를 말한다.

스코틀랜드 지도에서 잘록한 중앙허리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해서
"센추럴 벨트" 로 불리기도 한다.

이 실리콘 글렌에서 다국적기업 300여개의 공장을 포함, 약 450개의
전자회사공장과 250여 소프트웨어회사들이 모두 4만5,000여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세계전자산업의 중심으로 용트림하고 있다.

실리콘 글렌에 들어서 있는 기업들의 면모를 보면 IBM, 컴팩, 선마이크로
시스템 등 세계 10대 컴퓨터제조회사중 7개, 니콘, 어플라이드머티리얼 등
세계 10대 반도체장비 제조업체중 8개, 그리고 NEC, 모토로라, 내셔널
세미컨덕터, 후지전자, 시게이트, 디지털이퀴프먼트 등 반도체공장을
설립한 회사가 모두 6개이다.

세계 전자산업에서 실리콘 글렌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 분야의
생산점유율로도 쉽게 알수 있다.

데이터 퀘스트 조사에 따르면 유럽전체 PC시장의 35%, 반도체의 11%,
워크스테이션과 은행자동화기기는 절반이상이 실리콘 글렌에서 생산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또 각 기업들이 연구개발(R&D)시설과 산학협동체제를 구축해
두고 있어 생산규모 뿐만 아니라 기술개발측면에서도 유럽의 중심으로
평가받는다.

실리콘 글렌의 역사는 5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정부는 독일군의 공습으로부터 안전하면서도
풍부한 물과 전력공급이 가능한 스코틀랜드 중남부지방을 방위산업기지로
육성했다.

이 방위산업체들의 주도로 정밀공학과 전자공학의 발판이 마련됐고
50년대부터는 IBM, NCR, 모토로라 등 미국기업들이 진출해 실리콘 글렌의
혁명에 불을 댕겼다.

70~80년대에는 스코틀랜드의 대학산하 연구기관을 비롯한 각종
연구단체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외국자본과 결합해 벤처회사들을 무더기로
설립해 첨단기술혁명의 꽃을 피웠다.

이후 80년대초부터 유럽과 미국의 진출기업들이 더욱 늘어난데다 NEC,
미쓰비시, 신에츠 등 일본기업들까지 실리콘 글렌을 유럽진출의 전초기지로
여기고 잇따라 상륙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보통신과 컴퓨터산업의 비약적인 성장에 힘입어
실리콘 글렌의 위상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81년부터 95년까지 이곳에 유입된 외국기업의 직접투자규모가 18억파운드
인데 이중 80%가량이 90년이후의 투자이다.

특히 95년 한햇동안 총97건에 10억파운드규모의 외국기업 투자계획이
발표돼 스코틀랜드에는 1만2,000여명의 신규고용이 창출될 예정이다.

지역별로는 미국과 유럽기업들의 투자가 여전히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지역 전자회사들의 비중도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외국기업 투자유치를 총괄하는 스코틀랜드투자유치청(LIS)은 아시아지역
에서 한국 대만 싱가포르의 전자회사들이 실리콘 글렌진출 채비를 서두를
것으로 보고 있다.

앞으로 유럽시장공략을 위해선 반드시 현지공장을 설치해야만 하고 지형적
조건과 투자여건을 고려할때 실리콘 글렌이 최적지라는게 LIS관계자들의
주장이다.

기존 진출업체 관계자들도 이런 주장에 동의한다.

일본 니콘의 유럽자회사 NPE의 오토 와일드 부사장은 최근 스코틀랜드
리빙스턴에 2,200만파운드규모의 반도체장비 기술지원센터 설립계획을
발표하면서 "실리콘 글렌에 대한 투자는 우선순위차원이 아니라 필수불가결
하다는 판단에서 내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실리콘 글렌의 이같은 투자매력은 우선 잘 다져진 물류기반을 들수 있다.

실리콘 글렌내 도로망과 철도망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주요도시로 향하는 각 노선마다 하루 20회이상씩 출항하는 국제공항이
4개나 있다.

여기에다 실리콘 글렌의 어느 공장에서나 1시간이내로 항구에 닿을수 있다.

NEC 리빙스턴공장의 데이비스 존스톤 기획차장은 "영국내 고객에게는
제품을 하루만에 공급할수 있고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이틀안에 전달된다"고 말했다.

풍부한 인적자원도 실리콘 글렌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스코틀랜드에는 13개의 종합대학과 54개의 단과대학이 전자관련과정에서
매년 3,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전통적으로 산.학.연 교육체제가 잘 갖춰져 있어 이들 대학졸업생은
생산현장에 투입되자마자 곧바로 제몫을 할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

단순기술인력도 풍부하고 값싸기는 마찬가지다.

국가재정과 기업후원금으로 운영되는 74개의 기술학교가 매년 2만여명의
산업예비군을 훈련시킨다.

이들은 단순히 기술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근로윤리까지 습득해 산업현장
으로 투입된다.

일본 플라스틱주물회사 템마의 컴버놀드공장 임인호 공장장(56.재일교포
2세)은 "노동집약형인 우리공장뿐만 아니라 주변공장에서도 지금까지
노사분규가 발생한 적은 한번도 없다"면서 스코틀랜드 근로자들의 순종과
이해의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

내셔널세미컨덕터 그리녹공장의 게리 에드워드 공장장은 이 회사의 미국
실리콘밸리공장 생산비와 비교해 "생산원가가 50%정도 저렴하다"면서 이는
스코틀랜드의 저렴한 인건비와 높은 근로의식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투자매력에 더해 스코틀랜드 정부는 신규진출 외국기업들에 다양한
세제.금융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높은 실업률 해소를 최대 경제현안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외국기업들에 특혜를 주지 않을 수 없다는게 스코틀랜드당국의
생각이다.

이에 따라 외국기업들에 공장부지선정에 대한 취득세와 초기 3~5년동안
고정자산 투자비에 대한 소득세를 전액 면제해준다.

또 신규인력채용을 정부가 모두 무료 대행해주고 종업원 교육훈련비도
부담한다.

투자규모에 따라서는 공장건설비용의 70%까지 정부에서 저리융자로 지원해
주는 경우도 있다.

실리콘 글렌에 진출해 있는 기업들이 행정절차로 애로를 겪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곳의 6개 반도체공장이 투자계획을 확정하고 나서부터 제품을 만들어
내기까지 소요되는 기간은 평균 18개월.

공장부지를 확보하는데만도 몇년씩 걸리는 우리나라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그만큼 기업들은 시장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셈이다.

스코틀랜드에서 행정은 기업에 규제가 아니라 지원환경의 하나이다.

실리콘 글렌에서는 관련기업들 사이에 제휴와 연대활동이 매우 활발하다는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시장정보와 생산기술 협력단체인 "일렉트로닉스 포럼", 공동물류활동을
도모하는 "스피드", 소프트웨어기술정보를 교환하는 "스코티시 소프트웨어
연맹"등 다양한 협력단체와 특수법인들이 실리콘 글렌의 성장에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다.

경쟁업체라 할지라도 과감히 손을 잡고 전체의 이익을 증대하면 개별기업의
이익도 커진다는 계산이다.

이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는 실리콘 글렌에 아직까지 한국 전자회사들의
현지공장은 찾을 수 없다.

300여 외국기업중 3차원측정기를 생산하는 동우IMC가 유일한 한국기업이다.

스코틀랜드정부는 신규투자규모로 보면 세계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삼성전자 현대전자 LG반도체등 한국의 간판전자회사들이 이곳 실리콘 글렌
에서도 대규모 투자프로젝트를 곧 발표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에든버러(스코틀랜드) = 박순빈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