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방에 관한한 "서남아시아 선두"를 자부해온 인도가 지난주 지독한
홍역을 치렀다.

봄베이 외환시장에서 자국 루피화가 걷잡을수 없이 폭락하는 바람에 시장의
동요를 가라앉히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루피화는 2월 들어 미국 달러화에 대해 매일같이 최저치를 경신하며 수직
으로 떨어졌다.

루피화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가운데 수출업자들은 루피 가치가 더 떨어질
것으로 보고 달러 선물환계약을 서둘러 취소하는 소동을 벌였다.

반면 수입업자들은 달러를 사두려고 아우성이었다.

인도 중앙은행인 인도준비은행은 5일에는 외환시장에 개입,달러를 팔아
루피를 사들였으나 다음날부터는 아예 시장에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자 루피는 6일 달러당 38.30루피까지 곤두박질해 94년말의 멕시코
페소화 폭락사태를 연상케 했다.

시장에는 투기꾼들이 판치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인도 재무부와 중앙은행은 6일 비상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하는 한편 은행 관계자들을 불러 동요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날 저녁 중앙은행은 외환시장 안정화방안을 내놓았다.

여기에는 수출업자들의 달러 선물환 매도 취소사태를 철저히 점검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비상회의후 몬테크 신지 알루왈리아 재무장관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중앙
은행이 개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수출업자들이 정부로부터 달러 수출보조금을 받아내기 위해 가짜
신용장을 개설하는 사례가 많다고 지적하면서 수출상품을 선적한 업체에
제공해온 달러 자금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금융당국이 환율안정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힌뒤 시장은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루피는 9일 달러당 36.86루피까지 회복됐다.

투자자들은 인도의 외환보유고가 1백50억달러에 달해 멕시코 페소 폭락과
같은 금융위기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재빨리 루피를 사들여
포지션을 조정했다.

루피화가 급락한 것은 멕시코와 마찬가지로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인도 정부가 인위적으로 루피 고평가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외환정책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면서 루피 투매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루피화 환율은 93년 3월이후 2년반동안 달러당 31-32루피대에서 안정적
으로 움직였다.

인도준비은행이 철저하게 환율을 통제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작년 9월부터 부풀려진 루피화의 거품은 갑자기 꺼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멕시코 페소화가 폭락한뒤 이머징마켓에 대한 선진국들의
포트폴리오투자가 격감, 달러 수급균형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루피 강세로 인도의 대외경쟁력이 약해져 무역적자가 커진 것도 달러
부족을 야기한 요인이 됐다.

사실 인도 금융당국은 루피화 가치가 점진적으로 떨어지길 은근히 바랬다.

루피가 지나치게 고평가돼 수출업체들이 비명을 질러대기 때문이었다.

외환투자자들은 정부의 이같은 바램을 간파하고 과감하게 루피를 내다
팔았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정국이 불안해진 점도 루피 폭락을 부추기는 변수로
작용했다.

인도에서는 최근 정치자금문제로 정국이 소용돌이에 휘말린 가운데 현직
각료 3명과 야당 총재가 물러나고 라오 총리마저 곤경에 빠졌다.

경제개방을 추진해온 인도 정부는 이번에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

개방경제에서는 정부가 무리한 정책을 고집할 경우 유권자들이 평가를
내리기 이전에 금융시장이 먼저 "보복"한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불씨는 남아 있다.

최근 발표된 환율안정책은 사실상 미봉책에 불과하다.

어떤 계기가 생기면 루피는 다시 폭락할 소지를 안고 있다.

<김광현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4일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