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실패의 대가는 냉혹하다"

100년을 훨씬 넘는 전통깊은 독일의 전자업체 AEG가 남긴 뼈아픈 교훈이다.

한때 전세계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AEG브랜드는 이제 내년봄이면
완전히 사라진다.

그동안 누적된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공중분해의 길을 걷게됐다.

모기업 다임러 벤츠는 지난주 AEG의 에너지와 산업자동화사업부문을 매각
했다.

내년봄께는 프랑크푸르트의 AEG본부가 문을 닫는다.

철도엔지니어링, 우편자동화, 디젤엔젠, 마이크로전자공학등 비교적 잘
굴러가는 4개 사업만 다임러 벤츠의 품안에 남고 나머지는 모두 새 주인을
찾아 조각조각 찢어지게 될 것이다.

그나마 인수기업을 찾지 못할 경우 폐쇄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AEG도 ''될성부른 나무''였다.

혁신면에서는 우등생이었다.

고성능 전기기관차, 녹음기, 팔(PAL)방식 컬러TV 모두가 AEG의 발명품
이었다.

그러나 AEG는 만성 자금부족에 경영미숙이라는 양대 결함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몇차례의 불운한 사건이 겹치자 AEG는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AEG의 불운은 1883년 에밀 라테나우가 AEG의 전신 도이치에디슨게젤샤프트
를 설립할 때부터 잉태돼있었다.

라테나우는 초창기부터 자금부족에 시달렸으나 첫 사업인 전구장사가
그런대로 괜찮은 실적을 올리자 전기와 관련된 사업이라면 무엇이든지 확장
해갔다.

1903년에는 시속 200km로 달릴수 있는 엔진을 개발했지만 ''현실성이 없다''
고 판단, 프로젝트를 중단해버렸다.

AEG의 역사는 이처럼 파격적인 발명-자금난-경영오판-사업포기의 악순환
으로 얼룩졌다.

한술 더 떠 2차대전후에는 불운까지 닥쳤다.

AEG는 공장중 90%를 구동독지역에 두고 있었다.

동서독 분할과 함께 이 모든 시설이 날아가버린 것이다.

AEG는 그때부터 구서독지역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50년대 AEG에도 황금의 시절이 찾아왔다.

모든 사업부문의 공장을 풀 가동해도 수요를 쫓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서도 잠깐.

경영오판으로 사업이 다시 기울기 시작했다.

AEG는 메인프레임 컴퓨터사업과 핵에너지를 양대 핵심사업으로 선정하고
곧이어 가전업체를 잇달아 인수하면서 가전사업을 무모하게 확장했다.

직원도 17만1,000명까지 불어났다.

현재(약5만명)의 3배가 넘는 숫자이다.

70년대 들어서 핵발전공장 사고에 메임프레임 컴퓨터의 판매부진, 오일쇼크
등 악재가 겹치면서 AEG는 재기불능이 지경으로 빠져들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갚느라 허덕이는 통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자본
까지 말라버렸다.

82년 AEG의 순부채는 50억마르크(34억9,000만달러).

당시 매출(120억마르크)의 절반에 육박해가고 있었다.

결국 AEG는 파산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2년후 채권자들은 부채탕감조치에 합의했다.

그 이듬해 다임러 벤츠가 AEG를 인수하면서 희망의 빛이 되살아나는 듯
했다.

그러나 AEG의 방만한 운영은 계속됐다.

전자부품과 운송시스템등 장기 수익성을 보장하는 알짜사업에 주력하기는
커녕 에너지장비와 대형가전제품등 여기저기에 투자를 분산시켰다.

90년대들어 침체가 시작되자 매출은 곤두박질쳤다.

마지막 합리화노력도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AEG는 ''다임러벤츠 최대의 경영실패''라는 낙인이 찍힌채 회생시나리오
에 종지부를 찍었다.

내년부터 AEG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살아남은 일부 사업부문도 AEG의 흔적을 지운채 완전히 얼굴을 바꿔 버릴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냉엄한 교훈뿐이다.

아무리 거대한 기업일지라도 경영실패에 따른 ''처벌''을 면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