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붕괴와 동유럽사회주의국가들의 몰락속에서도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던 쿠바. 세계에서 몇 안남은 사회주의국가들중
하나인 쿠바에서도 변화의 바람은 일고 있었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상품가격이 결정되는 농산물시장과 공산품시장이 최근
곳곳에 만들어졌고 식당이나 수리소등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도 적지 않았다.

공산당집권과 계획경제 국영기업이 아직까지 쿠바의 기본골격을 이루고
있긴 하지만 시장경제요소가 싹트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느낄수
있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시 19거리 A가에서는 농축산물시장이 매일 아침
열린다.

쌀 밀가루 과일 야채 돼지고기등 갖가지 농축산물들이 팔리고 있다.

이곳에 나온 상인들은 대부분 농민조합을 대표해서 나온 사람들이다.

정부가 정해준 목표량을 초과해서 생산한 농축산물을 시장으로 들고나와
판매하고 있다.

지난해10월 생겨난 19거리A가 농축산물시장에서 돼지고기를 팔고있는
프란시스코 로렌소씨(35)는 "돼지를 키우는 농민조합의 대표로 시장에
나왔다"며 "돼지고기값으로 받은 돈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준다"고 말했다.

러시아산자동차 수리공장인 모스코비치에서 근무하다 지난5월
농산물시장으로 직장을 옮겼다는 그는 "전직장에서는 매월 2백17페소를
받았으나 지금은 5백~6백페소 이상을 벌고있다"고 자랑했다.

공산품시장에서는 신발 옷 화장품 탁자등 여러가지 생활용품이 팔리고있다.

농축산물시장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목표량을 초과해서 만들어진 제품들이
이곳에 나온다.

지난12월 개장한 아바나시23거리 공산품시장 가구점포에서 일하고 있는
알폰소 비야누에바씨(63)는 "92년 농업성에서 퇴직한후 일자리가 없어
놀다가 올해초부터 이곳 시장에서 근무하고있다"며 "식탁과 흔들의자가
많이 팔리고있다"고 말했다.

쿠바에 농축산물시장과 공산품시장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말
부터이다.

쿠바정부가 국가에서 독점운영해온 농산물판매를 시장원리에 맡기는
농업시장제를 지난해 9월 도입했다.

생산자들이 목표량이상 초과생산한 농축산물을 시장에 직접 판매할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생산효율을 높이려는 조치였다.

공산품시장은 원자재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는 중소기업들이 수공품과
잉여공산품을 직접 판매할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제한적이나마 자본주의적인 시장제도가 도입된 셈이다.

쿠바인들이 미국달러를 직접 사용할수 있게된 것도 최근의 변화중 하나다.

쿠바정부가 지난93년7월 내국인들의 달러화 보유및 사용을 허용하면서
달러를 지갑에 넣고다니는 쿠바인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외국인들만 출입했던 외국인상점(달러상점)도 내국인들에게 개방됐다.

달러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살수있게 됐다.

쿠바에 부분적으로나마 "달러경제"가 형성된 것이다.

아바나시 5거리42가에 있는 달러상점(매장면적 6백여평)에는 빵 밀가루
비누 샴푸 콜라 주스등에서부터 TV 세탁기 냉장고 VTR등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들이 진열돼있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달러를 갖고있는 쿠바인들이었다.

이곳에서는 미국 일본상품뿐만 아니라 한국상품도 적지않게 눈에 띄었다.

LG전자의 소형냉장고(GR131S)가 3백19달러20센트였으며 세탁기(WF1045HP)는
5백37달러60센트에 팔리고 있었다.

삼성전자의 컬러TV(CT3329V)는 3백94달러80센트였다.

쿠바정부가 내국인들에게 달러보유를 허용하고 외국인상점을 개방한 것은
국민들 손에 있는 달러를 끌어모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겠다는 정책
이다.

쿠바내에서 달러를 사용할수 있도록 함으로써 해외거주 쿠바인들이 자국내
친척들에게 달러를 송금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쿠바인들이 개인적으로
보유하고있는 달러를 자국내에서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사회주의권 붕괴이후 모든 거래가 달러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달러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다.

쿠바는 89년부터 불어닥친 사회주의권 붕괴이후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있다.

지난해 쿠바국내총생산이 89년보다 34% 감소했다.

사회주의국가간 경제협력체제인 코메콘이 붕괴되고 소련의 경제원조도
중단되면서 대외교역이 거의 끊겼다.

새로운 기계도입은 커녕 기존에 갖고있던 설비마저도 부품부족때문에
정상적으로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

쿠바경제의 근간인 사탕수수산업의 경우 80년대말 연간 9백만t을
생산했으나 지난해 4백만t수준으로 떨어졌다.

부품과 석유부족으로 농업설비들을 제대로 사용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발 의류등 경공업제품과 기계등 중공업분야도 생산이 크게 줄어들기는
마찬가지다.

쿠바정부가 최근 외국인투자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도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볼수 있다.

외국기업이 쿠바에 많은 돈을 쏟아부을수 있도록 세법과 부동산소유규정
투자비율등의 개선작업을 진행하고있다.

쿠바공산당은 지난86년 열린 제3차 전당대회에서 독자적인 사회주의노선을
천명하면서 물질적 인센티브제도와 시장메커니즘을 비판했었다.

89년 고르바초프 구소련대통령이 쿠바를 방문했을 때에도 개방정책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물론 아직까지도 사회주의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쿠바에 최근 시장제도가 도입되고 달러경제가 생긴 것도 "사회주의노선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사회주의경제권이 사라진 이후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로사왕 오르티스 투자부 아프리카.아시아경제협력담당관)이라는게
쿠바정부관계자들의 얘기다.

사회주의를 지키려는 노력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제도
도입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