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의 다자주의 원칙이 출발부터 흔들리고 있다.

WTO출범이후 본격적인 다자협상의 첫 시험무대인 금융서비스 협상이 이달말
마감시한을 앞두고 26일 시작됐지만 타결 가능성은 희박한 상태이다.

미국이 아시아국가등 신흥공업국들의 금융시장 개방의지가 미진하다는 점을
들어 현재 금융협상 진행상황에 강력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달말까지금융협상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다자원칙을 파기하고
국가별 "쌍무협상"으로 회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으며 유럽연합(EU)등
다른 선진국들도 미국의이같은 입장에 동참할 것으로 보인다.

28일 미국의 대일 보복관세 부과시한이 임박한 가운데 양국간 자동차 협상
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어 이틀새에 2개의 협상이 "연쇄결렬"될 경우
WTO의 "다자주의"는 초반부터 치유불가능한 타격을 입게될 것으로 우려된다.

금융개방은 WTO의 전신인 UR을 통해 미국과 EU가 7년간 협상 타결노력을
기울여 왔던 최대 목표였다.

그러나 94년말 UR이 막을 내리면서 금융과 통신,해운등 3개분야의 시장
개방 협상은 개도국들의 시장 취약성을 들어 WTO출범 이후로 연기됐었다.

이에따라 은행,보험및 투자등 금융서비스개방은 올 6월말, 통신과 해운은
내년 4월말, 6월말까지로 각각 타결시한이 미뤄졌다.

이가운데 첫 시험대인 금융협상에서 가장 큰 불만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미국.캔터 미무역대표부(USTR)대표는 최근 미상원 청문회에 참석,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인도,태국등 아시아국가들의 금융시장 개방노력이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각국의 무역장벽에 대한 연례보고서에서도 "말레이시아 정부가 30%이상의
지분을 가진 외국기업들에게 지분을 줄이도록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태국에 대해서도 시장개방에 미온적일 뿐 아니라 외국회사들에게 부여하던
기존 특혜마저 거둬들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태국은 최근 보험회사에 대한 외국인 소유지분 상한선을 45%에서 25%로
낮췄다.

인도네시아 역시 80%까지 허용돼 있던 외국기업의 보험사 지분소유를 49%
이하로 강화했다.

한국 역시 대표적인 "개방부진국"으로 꼽히고 있다.

미증권업협회는 한국 상장회사에 대한 외국인들의 지분소유가 불과 12%
(7월1일부터 15%)이하로 제한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한국이 가트 협약에 따라 외국인의 주식소유 상한선과
양도성예금증서(CD) 발행요건을 완화하겠다고 약속하는등 최근 개방노력에
큰 진전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물론 이들 아시아국가들이 미국의 제안에 따라 일정 기한내에 단계적으로
자유화하겠다는 약속을 할 경우 금융협상의 극적타결을 기대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금융시장이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이들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의
요구를 선뜻 받아들일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미국은 개방에 미온적인 국가에 대해서는 미국진출을 막겠다고 위협하고
있지만 이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 개도국의 금융기업들이 미국시장에 진출할 가능성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쌍무협상"이라는 칼을 휘두를 경우 1차적인 피해자는 한국을
포함한 개도국들이 될 것이다.

미국은 쌍무협상을 통해 개방압력의 수위를 훨씬 높일 것이며 이에따라
개도국들은 다자협상에서 보다 훨씬 불리한 입장에 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미국 역시 자기칼에 상처를 입는 것이 불가피하다.

쌍무협상을 통해 각국의 시장을 여는데는 훨씬 오랜 시간과 노력을 따르게
된다.

더욱이 통신,해운등 다른 분야까지도 이번 금융협상 실패가 파급될 것은
뻔한 이치이다.

이들 분야는 미국이 절대우위에 있는 산업인 만큼 이로인한 미국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다.

결국 이번 금융협상 실패로 미국이 쌍무협상의 칼을 빼들게 된다면
다자주의의 붕괴와 함께 전세계는 승자없는 무역전쟁에 휩싸이게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 노혜령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