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영섭 < 본사 논설위원 > ]]]


국제통화체제의 불안은 질과 양의 두가지 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자는 기축통화가치의 불안이며 후자는 기축통화공급의 불균형에
따른 딜레마이다.

즉 미국의 국제수지적자가 누적되면 기축통화인 달러가 과잉유출돼
국제유동성 팽창에 따른 달러가치 하락이 불가피하다.

반대로 미국의 국제수지흑자가 계속되면 달러의 신뢰도는 높아지는
대신 유동성 부족에 따른 국제금리의 상승과 이로 인한 세계무역의
위축 및 경기침체가 빚어진다.

지금 미국은 달러가치의 하락보다 기축통화 공급의 불균형에 더
주목하고 있다.

독일이나 일본은 막대한 무역수지흑자의 누적으로 마르크와 엔이
평가절상 압력을 받는데 비해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무역거래를 결제
하는데 필요한 달러 보유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달러가치의 급락으로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제통화체제의 불안이 지속되면 멕시코사태와 같은 개발
도상국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촉발될 수 있다.

국제통화체제의 불안을 기축통화의 유동성 조절과 연결시킨 시각은
이미 지난 60년 트리핀(Triffin)의 딜레마에서 제기됐다.

이는 금보유량에 비해 기축통화공급이 너무 적으면 국제적인 유동성
부족이 발생하며 반대로 기축통화의 공급이 너무 많으면 통화가치
불안이 심해지는 한계 때문에 브레튼우즈체제의 안정성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시각에서 미국은 엔고사태를 저지하려면 미일의 무역불균형을
적정선으로 줄여야 하며 이를 위해 일본이 무역수지 흑자감축에 관한
수치목표를 제시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금환본위제가 철폐된 뒤에도 여전히 세계경제에 유효수요를
창출해주고 최종지불은행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대신 기축통화를 공급
하는데 따르는 이득(seignorage)으로 자국 기업의 해외투자와 자국 금융
기관의 해외진출에 적지않은 혜택을 누렸다.

따라서 달러가치 하락은 미국의 무역수지적자가 누적된 때문이라기
보다는 막대한 재정적자와 낮은 저축률을 포함한 미국경제의 전반적인
약화에 근본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재정적자 감축은 정치군사적 이해갈등 때문에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지나친 재정긴축은 세계무역의 위축 및 경기
침체를 불러올 수 있다.

또한 국제통화체제의 불안이 지속되면 금융공황으로 악화되어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민스키(Hyman Minsky)의 이론대로 기업투자에 필요한
자금조달에서 부채의 비중이 클 때는 총투자는 예상이윤율 뿐만 아니라
금리변동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이는 다시 경기변동으로 연결된다.

즉 자금조달행태가 헷지방식(hedge finance)에서 투기적 방식(speculative
finance)으로, 투기적 방식은 더 위험성이 큰 폰지방식(Ponzi finance)으로
연쇄적으로 악화되고 이 과정에서 기업파산이 발생하는 상승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

특히 단기차익을 노리고 매우 공격적인 투자를 하는 헷지펀드는 폰지
방식에 해당하며 베어링은행의 파산처럼 국제금융시장을 교란시킬 위험이
크다.

또한 지난 1930년대의 대공황을 사례연구한 미국의 경제학자 버낸크(Ben
Bernanke)는 불황의 원인이 어디에 있건 금융시장의 불안은 실물경제에
대한 불황 압력을 증폭시킨다고 주장했다.

국제통화체제를 장기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는 방안이 나오기까지는
과도기적으로 미국 주도아래 주요 선진국들이 협조하는 공동개입이 불가피
하다.

또 미국이 주도하고 다른 나라들이 추종하는 과거의 협조적 게임(coopera
-tive game)은 더이상 계속되기 어려우며 미국 일본 독일 등이 보다 균등
하게 부담을 나누어 지는 수밖에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문제는 선진국들의 협상과정에 적용될 새로운 게임규칙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거 금본위제에서는 모든 나라들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균형예산
또는 금과 통화가치의 연계와 같은 정책원칙들이 게임규칙으로 기능했다.

그렇다고 미국이 과거처럼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세계를 주도할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당분간은 주요 선진국들의 정책협상은 비협조적 게임이 되기 쉽다.

일반적으로 비협조적 게임의 결과는 협조적 게임의 결과보다 좋지 않다.

이번 엔고사태에서도 일본 중앙은행만이 지속적으로 개입했을 뿐 다른
주요 선진국의 협조는 미미했으며 지난 4월말 열린 선진7개국 재무장관
회담에서도 구체적인 합의도출에 실패했다.

주요 선진국들의 정책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게임규칙의 정립에는 좀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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