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체제의 출범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 새 질서에 적응하기 위한
각국의 노력은 다방면에 걸쳐 전개되고 있다.

네덜란드와 한국은 인구 자원 지리적 위치등 여러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많다. 따라서 21세기를 준비하는 시점에서 네덜란드는 우리가 모델로 삼아
야 할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농업 화훼 물류가 그 중에 포함된다.

본지의 양태진 경제부 금융팀장과 양윤모 사진부 기자가 주한네덜란드
대사관 초청으로 네덜란드를 다녀와 그 결과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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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네덜란드와의 역사는 사실상 오래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이름으로 박연이라 불린 얀 벨테브레라는 네덜란드인은 1627년(인조
5년) 태풍돕을 만나 제주도에 난파되었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1653년 ''하
멜표류기''로 유명해진 헨드릭 하멜이 태풍으로 제주도에 표착하게 되었다.
박연이 당시의 제주목사 이원진과 하멜 대화에 통역으로 끼어든 것은 자연
스러운 수순이었다. 네덜란드어와 한국어 간의 가교를 만든 최초의 통역관
이었다고나 해야 할까.

짐 엔터즈씨는 3백년 전총을 지닌 네덜란드 굴지의 화학회사 악조-노벨
(AKZO-NOBEL)의 서울 지사장이다. 말하자면 박연과 하멜의 후예다. 그와
마주앉으면 우선 말이 편해진다. 네덜란드어는 물론 영어 독어 그리고 인
도네시아어등 5개 국어에 능통한 그의 언어실력때문이다.

영어 하나를 배우려고 수십년을 보내야하는 우리로서는 부럽기도 하거니
와 놀라운 사람이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네덜란드에 직접 가보면 엔터즈씨가 결코 특출하거나 예외적인 사
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또한번 놀라게 된다.

웬만한 교육을 받은 네덜란드 사람이면 최소한 영어 독일어 불어 정도는
모두 할줄 안다( 신순자 국립레이든대 교수 )는 사실에서 네덜란드가 국제
거래에서 남다른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어렴풋이
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네덜란드에 머무르는 동안 택시운전사 치고 영어를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엔터즈씨의 최고위 상사인 세스 판 레데 악조 노벨회장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그는 네덜란드어는 물론 영어 독일어 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
어 그리고 스웨덴어까지 무려 7개국어를 거침없이 할 수 있다고 했다.
엔터즈씨보다 2개국어를 더할줄 안다는 얘기다.

그렇게 많은 외국어를 하게된 배경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판 레데 회장은
다른나라 사람들이 우리 네덜란드어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
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파는 것이냐는 식이다. 네덜란드 사람다운 자세다.
요즈음 우리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명확치 않은 국제화를 외쳐대고 있지
만 네덜란드인들은 유심히 살펴보면 국제화라는 것이 구호로만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네덜란드인들에게는 국제화가 이미 생활속에
용해되어 있다는 얘기다.

암스테르담에 가면 안네프랑크와 그녀의 가족들이 나치 독일의 눈을 피해
숨어지내던 이른바 ''별채''전시실에 8개국의 각기 다른 나라말로 설명해 주
는 ''이어폰''이 설치되어 있다.

한국의 K&J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는 루이스 드 부르라는 젊은
여인이 유창한 한국말로 자기 소개를 해오는데는 아연 놀라지 않을 수 없
었다.

사람들을 유대인과 중국인을 위대한 상인들로 묘사해왔다. 유럽사람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을 ''유럽의 중국인''이라 부른다. 네덜란드인들의 남다른
국제상인으로서의 자질을 평가하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와 네덜란드인들이 외국어에 노출되는 상황은 많이 다르다. 외국
어 구사능력이 국제화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사람들과 경쟁
하겨 이기기 위해서는 그 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먼저 구사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MD 판 덴 버그 로테르담 항만청 관리의 말 속에
서 우리의 현주소를 찾지 않을 수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9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