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막을 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은 상금랭킹 톱10이 총출동한 ‘명품 대회’답게 명품 플레이가 이어졌다.
박지영 박지영(26)은 우승컵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선수다. 최종 라운드 초반, 박민지(24)가 4타 차까지 달아나면서 그대로 승부가 결정되는 듯했지만, 박지영은 쉽게 우승컵을 양보하지 않았다. 경기 중반 박민지가 주춤한 틈을 놓치지 않고 격차를 좁히더니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 박민지가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경기 내내 고도로 집중해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박지영이 동타로 따라붙은) 16번홀에서는 ‘우승 못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포천힐스 퀸’을 끝까지 위협했다.
임진희 생애 첫 타이틀 방어에 나선 임진희(24)도 디펜딩 챔피언다운 경기를 펼쳤다. 이날 전반에만 버디 3개를 잡아내며 공동 2위로 올라서기도 했다. 후반 들어 기록한 2개의 보기가 뼈 아팠다. 그래도 18번홀에서 공을 홀 옆에 붙이는 날카로운 어프로치 샷으로 버디를 잡아내며 9언더파 207타 공동 6위로 대회를 마쳤다.
유해란 대상포인트 2위로 박민지를 바로 아래에서 추격하고 있는 유해란(21)은 2라운드까지 2언더파로 이름값을 제대로 못했다. 하지만 3라운드에서 첫홀 이글을 시작으로 버디 4개를 추가해 공동 8위까지 올라가는 뒷심을 발휘했다.
26일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 최종라운드가 열린 경기 포천 포천힐스CC의 8번홀(파4). 박민지(24)가 이 홀에 들어설 때만 해도 그의 우승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박지영(26)을 비롯한 2위 그룹을 4타 넘게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민지의 짱짱한 실력과 단단한 멘탈을 감안할 때 추격자들이 이 정도 격차를 줄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하지만 243야드짜리 짧은 파4홀에서 박민지는 추격의 빌미를 내어줬다. 버디 또는 이글도 노려볼 수 있는 이 홀은 이번 대회 코스에서 가장 쉬운 홀로 평가된다. 하지만 여기서 박민지는 티샷을 벙커에 빠뜨렸다. 무사히 그린에 올렸지만 4m 버디퍼트를 놓치며 파로 마무리했다. 반면 박지영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티샷을 곧바로 그린에 올렸고 2퍼트로 버디를 잡아내며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8번홀에서 만든 좋은 흐름은 9번홀(파4)에서도 버디로 이어졌다. 박민지와 박지영의 양강구도가 굳어진 순간이다. 후반은 박지영의 시간이었다. 파 세이브로 이어가던 두 선수간 평행선을 먼저 깬 건 박지영이었다. 15번홀(파4)에서 5m 버디퍼트를 깔끔하게 성공시키며 1타차까지 따라붙었다. 박지영의 추격은 박민지를 동요시켰다. 박민지는 16번홀(파3)에서 2m 파퍼트를 놓치며 보기를 기록해 박지영과 동타로 내려앉았다. 이어진 두 홀에서 두 선수 모두 타수를 줄이지 못하며 승부는 18번홀(파5) 연장으로 이어졌다. 먼저 웃은 것은 '어우박(어차피 우승은 박민지)' 박민지였다. 세번째 샷 어프로치가 다소 짧았지만 버디퍼트를 잡아내며 끝내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박지영은 버디퍼트에서 공이 홀을 스쳐가며 시즌 2승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신인 윤이나(19)는 최종라운드에서 2언더파 70타를 쳐 3위(11언더파 205타)에 시즌 최고 성적을 기록했고 디펜딩 챔피언 임진희(24)는 2타를 줄인 끝에 공동 6위(9언더파 207타)로 '포천힐스CC의 강자'임을 증명했다. 2라운드에서 단독 선두에 올라 생애 첫 우승의 기대에 부풀었던 서어진(21·9언더파 207타)은 이날 3타를 잃고 공동 6위로 밀렸다.포천힐스CC=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박민지(24)는 그동안 연장전을 네 차례 치렀다. 세 번 이겼고, 한 번 졌다. 박민지에게 유일하게 ‘연장 패배’를 안긴 대회가 2년 전 이맘때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이었다. 당시 버디 기회를 잡았지만, 이글을 기록한 김지영(26)에게 밀렸다.26일 경기 포천시 포천힐스CC(파72)에서 열린 ‘BC카드·한경레이디스컵 2022’ 최종 라운드 연장에 들어갔을 때, 박민지는 2년 전 연장 승부를 떠올렸을까. 상황은 그때와 비슷했다. 박민지는 3m 버디퍼트를, 박지영(26)은 2m 버디퍼트를 남겨놓은 상황. 결과는 반대였다. 박민지는 “‘이걸 넣지 못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들어갔다”며 웃었다. ‘넘사벽’ 된 박민지박민지가 또다시 정상에 우뚝 섰다. 올 시즌 10개 대회에 나와 3승을 올렸다. 이런 속도라면 지난해 세운 한 시즌 최다승(6승)을 넘어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최종합계 12언더파 204타를 친 뒤 연장 승부 끝에 우승한 그는 상금 1억4400만원을 추가하며 상금랭킹 1위(6억3803만원)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KLPGA투어 통산 13승으로, 김효주(27)와 함께 역대 공동 4위에 올랐다. 이 부문 1위는 20승을 거둔 고(故) 구옥희와 신지애(34)다. 첫 승을 거둔 뒤 13승을 쌓기까지 걸린 시간은 5년2개월10일로 김효주(9년5개월4일), 장하나(8년4일)를 능가한다.이제 박민지는 국내에선 그 누구도 ‘라이벌’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되고 있다. 상금왕(6억3803만원), 대상 포인트(351점), 다승왕(3승), 평균타수(69.9타·1위) 등 모든 타이틀이 그의 손에 있다. 세부적으로 그린적중률(78.9%·5위), 평균퍼팅(29.93타·19위), 드라이버 비거리(241야드·41위) 등 모든 분야에서 약점을 찾기 힘든 ‘올 라운드 플레이어’다. “근력은 여성 골퍼 상위 1%”박민지는 어떻게 ‘최강’이 됐을까. 전문가들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운동 선수 DNA’부터 꼽는다. 박민지의 어머니는 1984년 LA올림픽 핸드볼 은메달리스트인 김옥화 씨다. ‘몸을 쓰는 능력’을 박민지에게 물려준 사람이다. 자질만 내려준 게 아니었다. 강도 높은 운동으로 자질을 꽃피울 수 있도록 도왔다. 박민지는 비시즌 때도 매일 2시간가량 근력 운동을 한다. 골프 선수들의 근력 운동을 담당하는 팀 글로리어스 관계자는 “박민지는 여자 골프 선수 가운데 상위 1%의 체력과 근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박민지를 넘사벽으로 만든 두 번째 요인은 ‘강철 멘탈’이다. 연장전 승률(80%)이 말해준다. ‘승부사’ 김세영(29)의 연장전 승률(75%)보다 높다. 웬만한 선수들이 다 받는 멘탈 트레이닝을 안 받는데도 그렇다. 좋지 않은 기억은 빨리 잊고 눈앞의 목표에만 집중한다. 또 승부를 즐긴다. 박민지는 “연장전을 좋아한다. 연장에 가면 2등은 확보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끈기도 남다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한국체대 축구 전공 대학생들과 똑같이 체력 훈련을 받았을 정도다. 박민지는 “매일 10㎞ 넘게 뛰었다”며 “그때 훈련량을 돌이켜보면 어떻게 해냈는지 저 스스로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마지막 퍼즐은 적절한 휴식이다. 박민지는 “시즌이 끝나면 한 달 이상 클럽을 잡지 않는다”며 “스트레스 받을 때 맛있는 것 먹고 수다를 떨면 골프에 더 집중이 된다”고 말했다.한국 골프를 평정한 박민지는 다음달 21일 프랑스에서 열리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대회 ‘에비앙 챔피언십’에 출전한다. 세계랭킹 18위 자격으로 나간다. 박민지는 “과거에 비해 LPGA투어 진출에 대해 전향적으로 바뀐 건 사실”이라며 “우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포천힐스CC=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
총 전장 6610야드(파72). 26일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총상금 8억원)이 열린 경기 포천시 포천힐스CC는 긴 코스는 아니다. 하지만 티샷의 정확도를 요구하는 페어웨이와 공이 떨어질 만한 곳마다 어김없이 파놓은 ‘함정’은 3라운드 내내 선수들을 시험에 들게 했다. 굿샷에는 ‘짜릿한 보상’을, 미스샷에는 ‘철저한 응징’을 선사하는 코스란 얘기다.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 대회 때마다 명승부가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긴 러프·어려운 그린에 3퍼트 속출리더보드 상단에 오른 선수들은 하나같이 “페어웨이를 지키지 못하면 ‘포천힐스 퀸’이 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올 시즌 KLPGA 투어의 드라이버 비거리 1위이자 이 대회 3위로 경기를 마친 윤이나(19)는 “티샷을 멀리 똑바로 보내야 하는 코스”라며 “멀리 보내면 그만큼 세컨드 샷이 쉽지만 페어웨이를 놓치기 쉽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우승컵을 품은 박민지가 최종 라운드를 앞두고 가장 신경 쓴 것도 티샷이었다. 전날 2라운드를 2타 차 2위로 마친 그는 기자와 만나 “쉬운 듯하면서도 까다로운 코스다. 티샷을 정확하게 보내는 게 중요하다. 최종 라운드에서는 페어웨이를 지키는 데 가장 중점을 두겠다”고 말했다. 경기는 박민지의 예상대로 흘렀다. 그는 페어웨이를 지킨 홀에서는 버디를 잡거나 파 세이브로 스코어를 지켰다. 하지만 티샷을 벙커로 보낸 3번홀(파5)에서 보기를 기록했다.러프는 대회 기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며 3라운드 내내 선수들을 괴롭혔다. 이날 윤이나의 발목을 잡은 것도 긴 러프다. 17번홀(파4) 티샷을 러프에 떨어뜨렸다. 두 번째 샷에서 긴 러프에 감긴 공은 홀에서 25m 떨어진 그린 입구에 멈췄다. 결국 이 홀에서 보기로 한 타를 잃으며 역전의 기회를 놓쳤다.5번홀(파4)은 이날 톱랭커들의 순위를 뒤바꾼 홀이었다. 홀 주변 미묘한 언듈레이션과 역결로 깎인 그린 잔디 탓에 퍼팅 라인을 잘못 읽는 선수들이 잇따랐다. 이날 경기 초반부터 버디를 잡으며 좋은 흐름을 탔던 박지영의 상승세가 꺾인 것도 이 홀이었다.박지영은 이 홀에서 두 번째 샷으로 공을 홀 6m 거리에 보내 버디 찬스를 만들었다. 오르막 라인이라 위치도 좋았다. 하지만 공은 미세한 차이로 홀을 비켜 나갔고 결국 3퍼트로 보기를 범했다. 공동 4위로 경기를 마친 오지현(26)도 이 홀에서 버디 찬스를 잡았지만 잔디 역결에 밀려 3퍼트로 마무리했다. 이글·버디 풍년 “짜릿한 보상”모험 뒤에는 달콤한 보상이 따랐다. 3라운드에서 8번홀은 243야드 길이의 짧은 파4홀로 새로 세팅됐다. 이날 이 홀에서 보기를 기록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과감하게 ‘원온’에 도전한 선수들에게 확실한 선물을 줬다. 조아연(22)이 그랬다. 드라이버로 친 티샷은 220m를 날아 홀 5m 거리에 붙었고, 이글로 마무리했다.2라운드까지 이븐파를 치며 턱걸이로 커트를 통과한 고지우(20)는 이날 하루에만 5언더파를 몰아치며 공동 22위로 경기를 마쳤다. 3언더파로 마지막 홀에 나선 고지우는 핀까지 200m를 남겨두고 3번 우드를 잡았다. 과감하게 때린 공은 홀 3m 옆에 안착했고 이글을 기록하며 1, 2라운드의 아쉬움을 달랬다.신현주 SBS 해설위원은 “포천힐스CC는 샷이 조금만 흔들려도 매우 어렵게 느껴지는 코스”라며 “전략적인 코스 공략과 정확한 샷, 여기에 도전 의식도 더해져야 짜릿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포천힐스CC=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