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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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요? 아~하하하!”

방송가에선 요즘 그의 말투가 화제다. 말 끝에 ‘ㅇ’ 받침이 들어간 듯한 동글동글한 아줌마식 말투가 매력적이어서다. TV 가요프로그램 패널로 나와 잘생긴 남자 아이돌 가수를 칭찬할라치면 이런 식이다. “노래도 잘하궁~춤두 잘추궁~.”

그래서 “예능감을 타고난 듯하다”고 인사치레를 했더니 곧장 웃음을 터뜨렸다. ‘한국 골프의 살아있는 전설’ 박세리 씨(42)다. 지난달 29일 서울 소공동의 중식집 ‘크리스탈제이드’ 소공점에서 만난 그는 이웃집 아줌마처럼 곰살갑게 말하고 털털하게 웃었다. 아직 미혼이지만 ‘대전댁’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웃음이다.

사업·TV 출연에 골프 감독까지

박씨를 수식하는 말은 차고 넘친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한국인 최다승(25승), LPGA투어 최연소 메이저 4승, 한국인 최초 신인왕, 한국인 최초의 LPGA 명예의 전당 입성, 연장전 6전 전승의 ‘연장불패신화’…. 압권은 1998년 7월 US여자오픈 연장전 18번홀에서 보여준 ‘맨발 투혼’이다. 당시 외환위기 여파로 시름에 빠진 국민은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가 만들어낸 이 기적 같은 해저드 탈출 샷에 열광했다. 그에게 새하얀 맨발을 만들어준 반양말이 불티나게 팔렸고, 이를 흉내 낸 패러디가 연예계에서 유행했다.

“성공할 확률이 1%도 안 돼 보였는데, 도전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진 거죠. 20년이 넘게 지났지만 그때의 샷감은 인생 최고였어요.”

그는 제니 추아시리퐁(태국)과 92홀까지 가는 혈투 끝에 첫 메이저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미국 무대에 진출한 지 7개월이 채 걸리지 않은 루키의 반란이었다. 그해 4승을 거둔 박씨는 압도적인 점수 차로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2016년 10월 KEB하나은행챔피언십에서 눈물의 은퇴식을 한 그는 요즘 다양한 분야에서 종횡무진이다. TV 예능프로 출연이 두드러진다. 정글의 법칙(SBS), 라디오 스타(MBC), 수미네 반찬(tvN), 더 팬(SBS) 등 모두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들이다.

“주머니 사정이 좀 안 좋으신가?”하고 떠봤다. 부추딤섬과 쇼마이(돼지고기와 새우를 갈아 넣어 만든 중국식 만두) 두어 점을 맛보던 그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은퇴 이후에 출연 섭외가 많이 들어왔어요. 그중 몇 개만 골라서 한 건데 하필 프로그램 방영시간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여기저기 얼굴을 내민 것처럼 보인 것뿐이에요.”

그는 요즘처럼 바쁜 적도 없었지만, 지금만큼 행복한 적도 없었단다. 지난해 ‘세리와인’으로 와인사업에 뛰어들었고, ‘박세리’ 이름을 내건 컬래버레이션 골프웨어도 내놨다. 백화점에서 시작한 와인은 골프장으로 판매처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어 재미가 붙었다. 벌여 놓은 일 중 가장 어려운 건 예능이다. 골프보다 어렵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은 자꾸 늘어난다.

“인기 비인기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종목을 아우르는 스포츠 클리닉 센터를 운영해보고 싶고, 수제맥주사업에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게 그의 말이다. 타이거 우즈(미국)처럼 골프코스 디자인도 준비 중이다. 은퇴한 여자골퍼들이 대개 결혼이나 레슨 시장 진출로 귀결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광폭 행보다. 그는 “후배들에게 운동 외에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얼마 전엔 2020년 도쿄올림픽 여자 골프 국가대표팀 감독직까지 맡았다. 2016년 리우올림픽에 이어 2회 연속이다. 박세리의 맨발샷을 보고 골프클럽을 잡은 ‘세리 키즈’ 박인비 씨(31)는 116년 만에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부활한 골프에서 금메달을 따내 사상 첫 ‘골든슬래머’가 됐다. 감독 박씨는 금메달을 딴 박인비 씨보다 더 펑펑 울었다.

2회 연속 올림픽 금메달 도전에 대해 그는 “솔직히 욕심 나는 게 사실이다. 후배들을 믿는다”며 기대를 내비쳤다.

대인기피증까지 겹쳤던 지독한 슬럼프

이름이 독특한 비타민마늘볶음의 아삭함이 미각을 자극했다. 미국에 진출한 많은 한국 골프 선수가 음식 적응에 실패했다는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미국투어에 정착한 최경주 씨(49)와 투어 진출을 접은 강욱순 씨(53)의 명암이 햄버거에서 갈렸다는 따위의 말들이다. “매운 것 빼고는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어요. 중식도 그중 하나고요.”

물론 힐링푸드는 따로 있단다. 김밥과 닭볶음탕, 잡채다. 김밥은 김포공항에 착륙하자마자 찾아 먹는 첫 메뉴였고, 대전 본가에서는 둘째딸 박세리가 도착할 즈음에 맞춰 닭볶음탕을 끓이고 잡채를 무쳤다. 고향음식을 푸짐하게 먹은 그는 미국에 돌아가서도 오랫동안 생기가 돌았다. 자신의 성공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만족합니다. 애초부터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게 최종 목표였는데, 그걸 이뤘잖아요. 물론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요.”

박세리는 그랜드슬램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크래프트나비스코챔피언십(현 ANA인스퍼레이션) 트로피 한 개가 모자랐다. 세계랭킹 시스템이 2006년부터 시작된 탓에 1위 자리에 앉아보지 못한 것도 미완의 퍼즐이다.

무쇠 같던 그에게 슬럼프가 찾아온 게 2005년. 훈련이 부족한 줄 알고 연습에 몰두했다. 성적은 더 곤두박질쳤다. 한 예선에선 85타까지 쳤다. “나만큼 슬럼프를 철저히 관리하는 사람도 없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됐던 것 같아요.”

부진이 길어지면서 대인기피증이 왔다. 진심 어린 위로의 말조차 거북했다. “진짜 바닥까지 떨어지니까 내려놔지더라고요. 기대치가 없는 거죠.”

2006년 6월이었다. 당시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 박씨와 함께 트로이카로 불리던 카리 웹(호주)이 숍라이트클래식에서 모처럼 우승한 뒤 말했다. “이젠 네 차례야!” 박씨의 분위기가 편안해졌음을 직감한 것이다. 이 예언은 1주일 뒤 맥도날드챔피언십에서 그대로 적중했다. 박세리는 웹을 연장전에서 꺾었다. 웹은 박씨의 부활을 축하해줬다. 새우딤섬까지 싹싹 비운 그가 ‘별미’라며 추가 주문을 했다. ‘블랙빈 돼지갈비 딤섬’. 달콤한 검은콩 소스에 재워 촉촉하게 쪄낸 중국식 돼지갈비다. 다른 딤섬류와 달리 외피가 없는 이 메뉴는 오도독뼈가 뽀드득 씹히는 반전 식감이 남달랐다. 음식 주문을 돕던 조성문 소공점 운용팀장은 “돼지갈비 부위에서도 부드럽고 식감이 좋은 부위만을 발라내 만든다”고 설명했다.

떠도는 소문과 진실

많은 이가 궁금증을 품고 있는 한 가지. 공동묘지 훈련의 실재 여부다. 그는 “대전 유성CC 연습장에서 새벽 늦게까지 혼자 연습한 적은 있지만 공동묘지에서 훈련한 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샛길 주변 곳곳에 묘지들이 있었던 게 와전됐다는 것이다. 늘 곁에서 참견하는 아버지(박준철 씨) 때문에 결혼을 못했다는 항간의 설에 대해서도 물었다.

“남자친구는 몇 명 만났는데, 진짜 딱 맞는 사람을 못 만난 것뿐이에요. 막상 결혼까지 염두에 두고 제가 다가가면 그쪽에서 저를 부담스러워 하거나 그 반대인 경우도 있었고요.”

이상형은 어떤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그중에서도 “고기를 맛있게 먹는 남자가 보기 좋더라”고도 했다.

골프를 쳐서 번 돈이 500억원이 넘는다는 얘기, 그나마 번 돈을 다 날렸다는 소문도 궁금했다. “둘 다 잘 모르고 하는 말이에요. 상금 외엔 다 부모님에게 드렸는데, 투어 생활에 연간 최소 25만달러가 들어가거든요. 미국에서 투어를 뛰고 한국을 오간 기간만 18년이 넘어요.”

마지막으로 하나 더. 아빠의 강요와 감시 속에서 골프를 했다는 설이다. 그는 “아빠 사업이 어려워졌을 때 오랫동안 동업한 분들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냉정하게 거절당하는 걸 목격한 뒤부터 오직 골프로 성공하자는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살았다”며 “나는 오히려 누가 시키면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강조했다.

골프와 닮은꼴 사격 “짜릿한 손맛 비슷해”

마지막으로 북경오리가 나왔다. 정량인 하루 18마리가 다 팔리면 더 이상 주문을 받지 않는 한정 메뉴다. 바삭하게 구운 껍질을 파채와 함께 얇은 밀가루 전병에 싸 입안에 넣었다. 오리 특유의 고소함과 ‘야’라는 이름이 붙은 짭조름한 된장소스 향이 입안에 가득 번졌다. 골프가 아닌 다른 일에 푹 빠져본 적은 없을까. 답이 사격이라니 의외다. 미국에서 접한 저격수용 소총 사격에서 골프와 비슷한 손맛을 느낀 게 계기가 됐다. 한국에 와서도 태릉 사격장에서 짬나는 대로 클레이 사격을 즐겼다. 그는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결과가 느껴질 때가 있다”고 했다. 그의 특출한 재능을 알아본 태릉 사격장 관계자가 “타고난 사수”라며 국가대표를 권하기도 했다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골프를 친 지는 오래됐다. 가장 최근 라운드가 지난해 5월 US여자오픈 우승 20주년 행사 때였다. 76타쯤 친 것 같단다. “칠 만큼 쳤어요. 패션을 전공한 친언니처럼 사회공헌에 도움이 되는 미술치료 또는 팝아트 같은 걸 배우고 싶습니다.”

이미 다 이룬 그에게 골프란 무엇일까.

“미스터리예요.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고, 저도 궁금해요, 그 실체가.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골치 아파서 골프라고. 그럴듯하지 않나요? 하하하.”
[한경과 맛있는 만남] 박세리 "은퇴 후 사업가·방송인·감독 변신…'세리키즈'에게 다양한 길 보여줄 것"
■약력

△1977년 대전 출생
△금성여고 숙명여대 정치행정학과 졸업
△1989년 골프 입문
△1992년 KLPGA 첫 승 (중학교 3학년 재학 중)
△1996년 프로 데뷔 (신인상, 상금왕 수상)
△1997년 LPGA 퀄리파잉스쿨 1위
△1998년 LPGA 첫 승 (맥도날드챔피언십)
△2007년 LPGA 명예의 전당 세계 명예의 전당 헌액
△2010년 LPGA 마지막 우승 (벨마이크로클래식)
△2016년 8월 리우올림픽 여자 골프대표팀 감독
△2016년 10월 은퇴(통산 38승): LPGA 25승(메이저 5승) KLPGA 13승(아마추어 자격 6승)
△생애 총상금: 1258만3713달러 (약 140억원)
△2020년 도쿄올림픽 여자 골프대표팀 감독 선임
[한경과 맛있는 만남] 박세리 "은퇴 후 사업가·방송인·감독 변신…'세리키즈'에게 다양한 길 보여줄 것"
■박세리의 단골집 크리스탈제이드

미쉐린 받은 광둥식 요리 레시피…북경오리·딤섬 일품


서울 소공동 을지로입구역 인근의 크리스탈제이드(소공점)는 중국 광둥식 요리를 내는 음식점으로 딤섬이 메인 메뉴다. 1991년 싱가포르에서 시작해 전 세계로 퍼졌다. 2016년과 2017년 미쉐린가이드에 등재돼 1스타를 획득, 맛을 인정받았다. 싱가포르 오차드 로드에 있는 본점에서 미쉐린 1스타를 일군 ‘넘버 2’ 응싯쫑 주방장이 소공점의 헤드 셰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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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딤섬이라 하면 만두 형태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딤섬은 간단한 점심을 뜻하는 말로 대표적인 광둥요리 중 하나다. 크리스탈제이드에선 대표적 딤섬인 새우교자 쇼마이부터 검은콩 소스에 재워 은은하게 단맛이 느껴지는 블랙빈 돼지갈비, 얇은 피 속에 담긴 재료의 식감이 일품인 창펀 등 24종류의 딤섬을 즐길 수 있다.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샥스핀 찜도 주방장의 추천 메뉴다. 딤섬만 만드는 4명의 셰프와 북경오리만 전담하는 셰프 1명 등 6명의 셰프가 당일 조달한 재료로 그날 정해진 양만 요리해 판다. 음식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가격은 7500원부터 9만9000원까지 다양하다. 코스는 3만원에서 15만원까지 주머니 사정에 맞게 즐길 수 있다. 365일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 문을 연다. 브레이크 타임은 평일 오후 3시부터 5시다.

이관우/조희찬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