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사진=임대철 기자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사진=임대철 기자
"우리가 돈 빌리면 큰 일 납니다. 정작 자금이 시급한 기업의 조달 창구가 좁아질 수 있어요."

2001년 10월. 삼성전자는 회사채 시장에서 5000억원을 조달했다. 이 회사는 그 직후 22년 동안 한국 회사채 시장과 관계를 끊었다. 투자은행(IB)·금융회사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삼성전자를 찾아 회사채 발행을 타진하기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면서 위와 같은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IB는 자금 사정이 넉넉한 애플과 TSMC도 외부 차입에 나선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삼성을 설득한 바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자신들이 시장 자금을 흡수하면 다른 기업들의 조달금리가 뛰는 등 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1일 IB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해도 무차입 경영을 유지하는 등의 재무전략을 유지하기로 했다. 지난 2월 자회사인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연 4.60%로 20조원을 빌리는 계약을 체결했지만, 외부에서 회사채·대출 등으로 조달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반도체 경기가 꺾이면서 현금창출력이 예전만 못하고 올해 50조원 규모의 설비투자를 계획한 만큼 자금조달 유인은 어느 때보다 크다. IB 관계자들도 이를 포착해 삼성전자에 접근해 회사채 발행 여부를 직간접적으로 타진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관계자는 이에 대해 "한국 자금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외부서 조달할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자금시장 구축(Crowd-out)'에 대한 우려가 상당했다. 신용등급이 국가와 맞먹는 삼성전자가 자금을 빌리면 여타 기업들의 자금조달 여건이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회사채 발행으로 시중 자금을 흡수하면, 시장 유동성이 쪼그라든다. 그만큼 줄어든 유동성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여타 기업들의 조달금리도 뜀박질한다. 기업 자금조달 금리가 줄줄이 오르고 결국 빚으로 연명하는 좀비기업(한계기업)들로까지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빚더미에 시달리는 한국전력에서 발행하는 한전채가 시중자금을 싹쓸이하면서 일반 기업들의 자금난을 불러온 것만 봐도 명백하다.

넉넉한 '자금 곳간' 덕분에 외부서 돈을 빌릴 유인이 크지 않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사정이 비슷한 애플·TSMC 등은 수시로 회사채를 찍는다. 애플은 50억달러(약 6조6000억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타진하고 있다. 작년 8월에 55억달러를 조달한 데 이은 조치다. TSMC도 조만간 600억대만달러(약 2조58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찍을 계획이다. 이 회사는 지난 2월에도 600억대만달러의 회사채 발행에 나서는 등 수시로 차입하고 있다.

이들 회사는 현금이 넉넉한 편이다. 올해 1분기 말 애플의 현금을 비롯한 금융자산은 1663억3300만달러(약 221조2200억원)로 집계됐다. TSMC의 현금성 자산은 올 3월 말 66조9800억원(1조5892억대만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이들 회사는 넉넉한 현금을 조달해 미래를 대비하고 금융계와 기관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차원도 있다. 미국 등 자금시장의 자금이 풍부한 영향도 있다. 글로벌 신용등급이 AAA인 애플은 무위험 금리차익 거래를 할 유인도 높다. 낮은 금리의 회사채로 조달한 자금을 바탕으로 재차 회사채와 다른 나라 국채에 투자하면서 금리 차익을 얻고 있다. 올 1분기 말 애플은 만기 1년 이상인 회사채·국채 등에 1104억6100만달러(약 146조9000억원)를 투자하고 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