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3고(高)’에 따른 글로벌 복합 위기와 공급망 변화, 수요 감소가 덮치면서 기업들의 체감 경기가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삼성전자는 최근 수익성이 악화된 DX사업부문을 중심으로 경상비용 감축을 주문했다. 프린터 복사 용지를 포함해 소모품비 50%를 절감하고 해외 출장도 절반 이상 줄이는 내용까지 포함됐다.실제 삼성의 2023년 세계 가전 전시회(CES) 참석자 규모는 전년보다 축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3년 차 이상 직원 100~200명 규모로 운영해 온 해외 연수 프로그램(지역 전문가 파견)도 잠정 중단했다.경기 침체로 수출과 내수가 모두 불안해지면서 기업 체감 경기가 2년 2개월 만에 최저치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2년 12월 전 산업의 기업경기실사지수(BSI)가 전달(75)보다 1포인트 내린 74를 기록해 코로나19 사태가 한창이던 2020년 10월(74) 이후 2년 2개월 만에 가장 낮았다. 기업의 경기 인식 지표인 BSI는 100을 기준으로 수치가 낮을수록 경기를 부정적으로 전망하는 기업이 많다는 의미다.현장에서 느끼는 체감 경기는 더욱 싸늘하다. 한 기업 관계자는 “영업이익이 꺾이면서 삼성도 복사 용지를 아껴 쓴다는데 코로나19 사태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든 것 같다”며 “요즘은 출장 가서 법카(법인카드) 쓰는 것도 눈치가 보일 지경”이라고 말했다. ‘돈 안 되면 접는다’ 자산 현금화로 곳간 쌓기기업들은 경기 침체에 선제 대응하기 위해 앞다퉈 투자를 줄이고 유동성 확보에 나서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재계 맏형인 삼성이 스타트를 끊자 다른 기업들도 잇따라 긴축 경영 모드에 돌입했다.SK하이닉스는 반도체 혹한기를 맞아 10조원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2022년 투자액 대비 2023년 투자 규모를 50% 이상 줄이기로 했다. 2022년 4조3000억원을 투자할 예정이었던 청주 공장 증설을 보류한 데 이어 임원·팀장의 복리후생비·활동비·업무추진비 예산도 50% 삭감하기로 했다.비핵심 사업 매각으로 현금 확보에 나서는 기업도 있다. 롯데케미칼은 파키스탄에 있는 고순도테레프탈산(PTA) 생산·판매 자회사인 롯데케미칼 파키스탄(LCPL)의 보유 지분 75.01% 전량을 현지 화학회사에 매각했다. 비주력 사업을 정리해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면서 고부가 스페셜티와 친환경 소재 사업 강화를 위한 ‘선택과 집중’을 꾀하는 전략이다.SKC는 성장 한계에 부닥친 필름 사업을 사모펀드(PEF)인 한앤컴퍼니에 약 1조6000억원에 매각해 현금을 확보했다. LG디스플레이는 중국산 저가 공세에 밀린 한국의 액정표시장치(LCD) TV 패널 생산을 중단하기로 했다. 경쟁력을 잃은 사업 구조 조정으로 사업 효율화와 수익성 확보를 달성하기 위해서다. 동국제강은 브라질 CSP 제철소와 중국법인(DKSC) 지분을 매각해 잠재적인 재무 리스크를 덜어냈다.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전국 30인 이상 기업 240개사를 대상으로 ‘2023년 기업 경영 전망’을 조사한 결과 ‘현상 유지(68.5%)’와 ‘긴축 경영(22.3%)’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90.8%에 달했다. ‘확대 경영’에 나서겠다는 응답은 9.2%에 그쳤다. ‘긴축 경영’을 택한 기업들은 구체적인 시행 계획으로 ‘전사적 원가 절감(72.4%)’을 첫째로 꼽았다. ‘유동성 확보’와 ‘인력 운용 합리화’가 각각 31.0%로 뒤를 이었다.공격적인 투자로 세를 확장해 나가던 배터리업계도 속도 조절에 들어갔다. SK온은 미국 완성차 업체 포드, 튀르키예 대기업 코치(KOC)와 튀르키예에 지으려던 배터리 합작 공장 건립 계획을 철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금 시장 경색과 불안정한 수율 문제 등이 요인으로 꼽힌다.LG전자는 2022년 11월부터 각 사업 부서와 본사 조직원 일부로 구성된 워룸을 운영하고 있다. 조주완 LG전자 사장은 “경기 불황 장기화에도 근본적 경쟁력을 확보해 지속적으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건강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자 지향점”이라며 “워룸은 각종 비효율을 제거하고 근본적인 사업 및 오퍼레이션 방식을 개선하는 기회로 활용돼야 한다”고 했다.2022년 태풍 힌남노로 막대한 침수 피해를 입은 포스코는 1월 25일부터 철강 부문 비상경영 태스크포스(TF)를 꾸려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팀장은 포스코 대표이사인 김학동 부회장이 맡았다.포스코홀딩스는 최근 잠정 실적 발표를 통해 2022년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46.7% 감소한 4조9000억원을 기록했다고 공시했다. 4분기에는 태풍 힌남노로 인한 침수 피해와 수요 부진까지 겹쳐 4000억원 가량의 영업 손실을 냈다.김 부회장은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1000원의 비용이라도 절감하고 1톤의 원료라도 경쟁력 있게 구매하려는 노력이 절실해지는 시점”이라고 위기 의식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김 부회장은 삼성전자의 사무용품 절감과 SK하이닉스의 설비 투자 계획 감축과 같은 사례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채용·근무 형태 기조 바꾸는 IT 기업들IT업계 인재 확보 전쟁으로 연봉 인상 흐름을 주도했던 네이버·카카오는 인건비 등 고정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공격적인 채용 기조를 올해 보수적으로 할 방침이다.카카오는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시행해 온 재택근무제 폐지를 두고 갈등을 겪고 있다. 카카오가 재택근무 대신 사무실 출근을 우선으로 하는 ‘오피스 퍼스트’ 기반 근무제를 공식화하고 ‘격주놀금제’ 중단을 발표하자 이를 복지 축소로 받아들인 일부에서 반발 여론이 커지면서 술렁이고 있다.새로운 근무제를 발표한 후 카카오의 노조 가입은 이전보다 10% 늘었다. 현재 카카오 공동체(계열사) 조합원은 4000명으로, 이 중 카카오 조합원은 1900명이다. 카카오 노조는 “2021년 11월부터 ‘유연근무제 2.0’, ‘메타버스 근무제’, ‘파일럿 근무제’, ‘카카오온(오피스 퍼스트) 근무제’ 등 1년 새 근무 제도를 4차례나 바꾸면서 직원들의 불만이 쌓였다”고 말했다.직장인 1202명을 대상으로 인크루트가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12.2%는 희망퇴직·권고사직 등 감원 목적의 구조 조정이 현재 진행 중이라고 답했고 조만간 가능성이 있다는 응답도 32.7%나 됐다. ‘일부 부문 또는 팀을 통합하거나 인력 재배치 진행(예정)’이라는 응답은 23.3%였다.주4.5일제와 워케이션 등 파격적인 복지 제도를 앞장서 도입해 이목을 끌었던 CJ ENM은 최근 기존 9개 사업본부를 핵심 기능별 5개로 슬림화하는 조직 개편으로 체질 개선에 나섰다.CJ ENM은 2022년 3분기 엔터테인먼트 부문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하는 미디어 부문에서 141억원의 적자를 냈다. 사실상 부진한 실적에 대한 문책성 조직 개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업계에선 이번 조직 개편을 시작으로 인력 감축과 복지 축소 등이 추가적으로 단행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삼성전자가 적극적인 반도체 감산 대신 미래를 위한 투자를 택했다. 수요 위축에 따른 가격 하락으로 올 상반기 반도체 사업에서 ‘조(兆) 단위 적자’가 유력한 상황에서 나온 최고위 경영진의 결정이다. 단기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생산능력과 기술력을 높여 돌아올 호황기에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한 전략적 판단으로 분석된다. 삼성전자는 31일 지난해 4분기 확정 실적을 공개했다. 4분기 매출(70조4600억원)과 영업이익(4조3100억원)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8.2%, 68.9% 줄었다.반도체 불황이 영업이익을 끌어내렸다. 반도체 부문 영업이익은 27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96.9% 급감했다. 메모리사업부는 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재고가 쌓인 고객사가 구매를 줄이면서 D램 가격이 지난해 하반기에만 34% 급락한 영향이 컸다.실적 급감에 부담을 느낀 삼성전자 경영진은 웨이퍼(반도체 원판) 투입량을 조절해 반도체 생산량을 줄이는 ‘인위적 감산’을 검토했다. 감산하면 공급량이 줄어 반도체 가격 하락세가 멈추고 수요가 살아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이날 공개한 결론은 ‘인위적 감산은 없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콘퍼런스콜에서 “최근 시황 약세가 당장 실적에 우호적이지는 않지만 미래를 철저히 준비할 좋은 기회”라고 밝혔다. 이어 “올해 투자(CAPEX)는 전년(약 48조원)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고 중장기 수요 대응을 위한 인프라 투자도 지속하겠다”고 강조했다.반도체 생산량 조절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기술적 감산’에 대해선 부인하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생산라인 효율화와 첨단 공정으로의 전환을 추진 중”이라며 “단기적으로 비트(생산량)에 영향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시장의 수요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면서 불황을 돌파하겠다는 의미”라며 “삼성전자가 미래 대비 투자를 이어갈 것”이라고 평가했다.‘감산’ 기대가 사라지면서 이날 삼성전자 주가는 3.63% 하락한 6만1000원에 마감했다.황정수/정지은 기자 hjs@hankyung.com
삼성전자의 반도체 감산에 대한 시장의 기대는 상당히 컸다. 1위 업체가 감산에 뛰어들면 칩 가격 하락세가 멈추고 업계 전반의 수익성도 회복될 수 있어서다. 삼성전자 경영진도 최근 웨이퍼(반도체원판) 투입량을 줄이는 ‘인위적 감산’을 검토하며 득실을 저울질했다.장고 끝에 나온 결론은 감산이 아니라 투자다. 올해 50조원 규모 반도체 투자를 단행해 연구개발(R&D)과 생산능력 확대에 주력할 계획이다. 불황기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경쟁사와 격차를 벌리는 ‘성공 방정식’을 이번에도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 업황 전망은 부정적삼성전자가 31일 열린 실적설명회(콘퍼런스콜)에서 내놓은 올해 업황 전망은 ‘낙관’보다는 ‘비관’에 가깝다. D램, 낸드플래시,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이미지센서,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등 주요 제품·서비스 분야에서 “고객사의 재고 조정에 따른 수요 감소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글로벌 정보기술(IT)산업의 수요 부진 여파로 기업들이 반도체를 구매하기보다 쌓아놓은 반도체를 소진하는 데 주력할 것이란 얘기다. “하반기에 상황이 나아질 것”이란 전망도 언급됐지만 ‘내부적인 기대’라는 점을 감추지 않았다.삼성 안팎에서 공개된 반도체 관련 통계에서도 긍정적인 수치를 찾기 어렵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1월 PC용 D램 범용제품 가격은 전월 대비 18% 떨어진 1.81달러로 집계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반도체 전문가들을 인용해 “D램과 낸드플래시의 1분기 가격 하락률이 두 자릿수를 기록할 것”이라고 보도했고 블룸버그는 “3~4개월치 메모리반도체 재고가 쌓여 있다”고 경고했다. R&D와 시설투자 포기 안 해보통의 반도체 기업들은 이런 상황에서 특단의 조치를 꺼낸다. 웨이퍼 투입량을 조절해 공급량을 줄이는 ‘인위적 감산’이다. 지난해 10월께부터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일본 키오시아 등 주요 메모리반도체 기업이 줄줄이 투자 축소와 공급량 조절을 발표했다. 가격을 방어해 손실폭을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으로 평가된다.삼성전자 반도체사업을 담당하는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 경영진도 인위적 감산 카드를 외면한 건 아니다. 지난 주말까지 고심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론은 라인 효율화 작업 등을 통해 자연적으로 생산량을 줄이는 ‘기술적 감산’과 ‘투자 규모 유지’로 나왔다. 변화하는 시장 상황을 살피면서 감산 강도를 저울질하되 미래를 위한 R&D와 시설투자를 포기하진 않겠다는 의미다.수익성 확보를 위해 삼성전자는 상대적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최첨단, 고사양 제품으로 시장에 대응할 계획이다. 메모리사업부는 차세대 규격 제품인 ‘DDR5’의 서버·PC용 제품을 준비하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팹리스 역할을 하는 시스템LSI는 차량용 통합칩셋(SoC) 공급 확대, 중저가 스마트폰용 칩셋 판매 등에 나설 예정이다. 파운드리사업부는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을 활용한 3나노 2세대 공정, 2나노 1세대 공정을 통해 고객사를 늘리겠다는 방침을 공개했다. ‘생존’ 위한 합병 속도 낼 듯삼성전자의 공격적인 감산을 기대했던 경쟁사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가 ‘생산량을 크게 줄이지 않겠다’는 뜻을 나타내면서 공급 과잉 해소와 반도체 가격 반등에 상당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날 SK하이닉스와 대만 D램 업체 난야의 주가가 각각 2.43%, 4.15% 하락한 데도 이런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평가된다.시장에선 현재 진행형인 일본 키오시아와 미국 웨스턴디지털의 합병 등이 더욱 속도를 낼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생존을 위한 ‘물리적 결합’이 가시화할 것이란 얘기다.황정수/배성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