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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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인사이트 12월 12일 오후 5시8분

전환사채(CB) 투자자에겐 ‘풋옵션’(매도선택권)이란 안전장치가 주어진다. 원금 상환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CB 만기가 3년이라도 통상 발행 후 1년 뒤부터는 풋옵션이 부여된다. 투자자는 1년이 지난 시점에 주가가 전환가격보다 높으면 주식으로 바꿀 수 있고 반대인 경우엔 풋옵션을 발동해 발행기업에 CB를 ‘반품’할 수도 있다.

하지만 풋옵션이 발동됐다고 CB의 수명이 끝나는 게 아니다. 반품된 CB는 상당수 소각되지 않고 특정인에게 재매각된다. 이른바 ‘CB 재활용’이다. 재활용된 CB는 해당 기업 주가가 오를 때마다 언제든 시장에 출회되는 ‘매물 폭탄’으로 바뀔 수 있다. 발행 1년이 지난 만큼 아무 때나 주식으로 바뀔 수 있어서다. 머니게임 세력이 무자본 인수합병(M&A) 때 단기 차익실현을 쉽게 하기 위해 재활용 CB가 많은 상장사를 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CB 공장’의 2차 가동이다.

‘한배’ 탄 상장사-대주주-큰손

수익 못내 반품된 CB의 '수상한 재활용'…돌고 돌아 '폭탄 매물'로
12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코스닥시장 상장사가 올해 만기 전 취득한 CB 건수는 총 377건으로 집계됐다. 이 중 절반가량만 소각 결정이 이뤄졌고 나머지는 재매각됐거나 재매각 대상을 물색 중이다. 올해 하반기만 놓고 봐도 만기 전 상환된 CB를 재매각한 사례는 수두룩하다. 리더스기술투자(재매각 규모 280억원), 소니드(175억원), 이즈미디어(164억원), 메디콕스(145억원), KH전자(105억원) 등이 대표적이다.

리더스기술투자는 작년 10월 MG손해보험 자금 확충을 지원하기 위해 발행한 200억원 규모 CB를 반년 만에 취득한 뒤 올 10월 투자조합과 개인 등에 다시 매각했다. KH전자가 작년 3월 KH필룩스를 인수하기 위해 발행한 CB 150억원도 소각되지 않은 채 에스제이조합 등에 재매각됐다. 에스제이조합은 작년 쌍방울그룹 계열사끼리 CB를 인수하는 순환출자 고리에도 등장한 곳이다.

CB 재활용이 활발한 건 상장사와 그 대주주, ‘큰손 투자자’ 간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상장사는 CB를 어떻게든 재활용해 주식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게 유리하다. CB가 주식으로 전환되면 그만큼 부채가 줄고 자본이 늘기 때문이다. 대주주도 CB 재활용을 원할 때가 많다. 다른 투자자에게 CB가 재매각돼도 대주주에게 주어진 ‘콜옵션’(매수선택권)은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큰손들은 재활용 CB를 사면 언제든 주식으로 바꿔 단기에 수익을 낼 수 있다. CB 재활용을 둘러싼 이런 역학관계는 주가를 끌어올리려는 머니게임 세력에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큰손들은 재매각 CB를 사오기로 계약해 놓고 인수대금은 한 번에 주지 않는다. 주가가 오르면 CB로 차익을 실현하면서 단계적으로 CB 인수대금을 갚아나가는 식이다.

대한그린파워는 올해 8월 100억원 규모의 CB를 지브이비티 3호조합과 스타디움 3호조합에 재매각했는데 40억원만 받았다. 투자조합들은 이 중 30억원을 주식으로 바꿔 차익을 실현한 뒤 잔금 일정을 당초 9월에서 내년 1월로 연기했다. 에이티세미콘은 올해 3월 300억원 규모의 CB를 아임(현 아임존)에 매각했다. 약 9개월이 지났지만 아임은 CB 인수대금을 130억원만 납입했다. 에이티세미콘 주가가 오를 때 해당 CB의 일부를 처분해 인수대금을 마련하고 있다.

‘좀비 CB’ 방지 대책 필요

소각되지 않고 좀비처럼 떠도는 CB는 결국 매물로 출회되면서 개인투자자에게 피해를 준다. 소니드가 그런 사례다. 소니드는 작년 10월 메리츠증권을 대상으로 CB를 발행해 300억원을 조달했다. 이 CB는 올해 8월 소니드가 전액 재매입한 뒤 지금까지 10억~40억원씩 총 여덟 번에 걸쳐 재매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175억원어치가 투자조합 등에 매각됐다.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행 후 1년이 도래하자 재매각 CB 중 60억원어치는 올해 10월 12~14일 곧장 보통주 163만5767주로 전환됐다. 소니드 발행주식 수(1977만7794주)의 8%에 해당하는 규모다. 10월 7일 4735원까지 오른 소니드 주가는 CB의 보통주 전환 이후 약세를 보이면서 이날 3490원으로 하락했다. 현재 남은 CB가 보통주로 전환되면 650만 주 이상이 추가 상장하게 된다. 현재 발행주식 수의 30%가 넘는 물량이다.

CB 공장에 기댄 무자본 인수합병(M&A)의 결과물은 항상 ‘CB 폭탄’으로 마무리된다. 올 한 해 주식으로 전환된 CB 규모만 1조9000억원(원금 기준)에 달한다. 실제로는 2조~3조원 매물이 쏟아졌다는 얘기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신흥 부자들은 ‘대박’을 내는 반면 개미 투자자는 ‘쪽박’을 찬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문제는 이런 기형적인 머니게임 먹이사슬을 개미 투자자는 인지하지도 못한 채 주가 하락으로 피해를 본다는 점”이라며 “금융당국은 눈에 보이는 머니게임 세력의 CB 재활용까지 방치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투자은행(IB) 전문 변호사는 “중소형 상장사의 자금 여건을 감안해 전면 금지하는 게 어렵다면 재활용 CB도 재매각 후 1년 이상 지나야 주식 전환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바꾸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석철 기자 dols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