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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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불확실합니다. 모든 산업계가 투자를 놓고 ‘신중 모드’로 돌아섰습니다.”(허세홍 GS칼텍스 사장)

“모든 기업이 내년 투자 규모를 조정할 겁니다. 우리도 꼭 필요하지 않은 투자는 조정하겠습니다.”(이상균 현대중공업 사장)

국내 기업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내년 투자 계획을 보수적으로 짜는 건 물론 계획을 아예 백지화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 등 ‘3고(高) 한파’ 속에 내년 경기가 침체 국면을 이어갈 것이란 우려가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IT 설비투자 꽁꽁
반도체업계, 설비투자 10兆 '철회'…화학·철강도 "증설 접었다"
7일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내년 시설투자금 합계는 55조원으로, 올해(65조9000억원)보다 16.6% 줄어들 전망이다. 이 같은 전망치대로라면 내년 두 회사의 설비투자는 코로나19가 덮친 2020년(42조8000억원) 후 가장 작은 규모로 쪼그라든다. 삼성전자는 내년에도 올해 수준의 투자를 유지할 계획이지만, SK하이닉스는 올해의 절반 수준으로 삭감하기로 결정했다.

연간 수십조원을 투자하는 반도체업계는 물론 다른 제조업체들도 속속 투자 계획을 조정하고 있다. 대한유화는 지난달 24일 3000억원 규모의 플라스틱 스티렌모노머(SM) 설비투자를 무기한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최근 현대오일뱅크와 한화솔루션도 각각 3600억원 규모 정제설비 투자와 1600억원 규모 질산유도품 설비투자를 철회했다.

한국은행 조사국은 내년 정보기술(IT) 부문과 비(非)IT 부문의 설비투자가 올해보다 각각 13.2%, 0.5%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규환 한은 조사국 과장은 “반도체업체는 시황 악화에 따라 투자를 줄이고 있고, 디스플레이업체도 패널 가격 하락으로 투자 여건이 나빠졌다”며 “석유화학·철강업체도 전방산업 수요가 움츠러들면서 설비투자 계획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전했다.
180兆 ‘재고 폭탄’에 움츠러든 기업
기업들이 내년 투자를 줄이는 것은 우선 넘치는 재고 영향이 크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LG화학 등 시가총액 상위 30개 주요 상장사(금융회사 등 제외)의 재고자산은 지난 3분기 말 181조6222억원으로 집계됐다. 작년 말보다 62조7092억원(52.7%) 불어난 규모로 사상 최대다.

가계 씀씀이가 줄면서 재고가 창고에 쌓여가는 상황이다. 재고가 늘면 제조업체들은 가동률을 낮추고 중장기적으론 설비투자를 줄인다. 10월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72.4%로 전월보다 2.7%포인트 하락했다. 2020년 8월(70.4%) 후 최저 수준이다.

치솟는 금리도 석유화학·철강업체 투자를 옥죄고 있다. 이날 회사채 무보증 3년물(AA-급) 금리는 전날보다 0.024%포인트 오른 연 5.411%에 마감했다. 지난 1월 3일(연 2.46%)에 비해 두 배 이상으로 급등했다. 삼성중공업 두산퓨얼셀 같은 대기업도 최근 연 7~8%대 금리로 회사채를 찍어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연초 연 3~4%대 금리로 빌린 걸 감안하면 이자비용이 두 배로 불어난 것이다.

산업은행에 따르면 철강(30%) 정유(28.2%) 조선(25.8%) 등 제조업체들은 2018~2022년 설비투자금의 25~30%를 차입금으로 마련했다. 치솟는 금리가 이들 업종을 중심으로 투자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부진한 수출도 기업들이 투자를 주저하는 배경으로 꼽힌다. 통상 기업들은 수출 전망 등을 바탕으로 설비투자 계획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는 내년 한국의 수출이 4%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반도체 수출은 1105억달러(약 144조원)로 올해보다 15% 급감할 것으로 예상했다. 반도체 수요가 줄면서 가격이 하락하고 있는 탓이다. 시장조사업체인 가트너는 내년 D램 평균 가격이 올해보다 30.6%가량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