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GS그룹이 지난 5월 설립한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GS벤처스는 이달 초 처음으로 스타트업 투자에 나섰다. 친환경 대체 가죽을 개발하는 마이셀, 탄소나노튜브 기술을 보유한 어썸레이를 비롯해 레브잇(공동구매 플랫폼), 에스와이솔루션(대체육), 메이크어스(영상 콘텐츠) 등 5개사에 총 60억원을 투자했다. 1300억원 규모 펀드를 만든 지 한 달 만이다.

#2. 무신사는 올 들어 모델 매니지먼트 고스트에이전시, 남성 헤어 미용실 프랜차이즈 레드폴 등 8개 스타트업에 투자자로 나섰다. 계열 창업투자회사인 무신사파트너스를 통해서다. 현재 500억원대 운용 규모를 2000억원까지 늘릴 계획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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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이 앞다퉈 CVC를 설립하고 있다. 5대 그룹부터 중견 제조기업, 갓 상장한 중소기업까지 스타트업 투자로 미래 성장 엔진을 확보하겠다며 CVC를 내세우고 있다. 하반기 들어 국내 스타트업 투자가 크게 위축된 가운데 기업 자금을 등에 업은 CVC들이 생겨나면서 투자 시장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8일 한국경제신문이 한국벤처캐피탈협회와 여신금융협회에 등록된 390개 벤처캐피털(VC·지난달 말 기준)을 전수 조사한 결과 36.1%인 141곳이 기업들이 최대주주인 사실상 CVC로 집계됐다. 형태별로는 신기술사업금융회사(신기사)가 91곳 중 64곳(70.3%)이, 창투사는 220곳 가운데 74곳(33.6%)이 기업의 자회사 및 관계사였다. 이들의 운용 규모는 VC 평균 수준을 웃돈다. 창투사의 경우 전체 운용 규모(41조1783억원)의 46.8%인 19조3004억원을 CVC가 차지하고 있다.'

건설, 의류회사까지…CVC에 꽂혔다


CVC 열풍엔 대기업에 이어 중견기업, 스타트업까지 가세했다. 올 들어 지난달까지 8개월간 17곳의 CVC가 신규 등록했다. ‘제2의 벤처붐’이 일었던 지난해(연간 19건)를 뛰어넘을 전망이다. 지난달에는 모바일 게임업체 모비릭스(모비릭스파트너스), 제주맥주(카스피안캐피탈) 등이 CVC를 설립해 스타트업 발굴에 뛰어들었다.

대기업 지주사들도 올 들어 대거 설립 대열에 동참했다. 일반지주회사가 금융 자회사를 보유할 수 없도록 한 공정거래법이 지난해 말 개정돼 지주사도 100% 자회사 형태로 CVC를 보유할 수 있게 되면서다. 동원(동원기술투자), GS(GS벤처스), 의류회사 F&F(F&F파트너스)의 CVC가 잇따라 출범했다. CJ그룹은 금산분리 원칙 때문에 팔아야 했던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를 지난달 되사들여 CVC인 CJ인베스트먼트로 출범시켰다. 효성(효성벤처스), LF(LF인베스트먼트) 등도 신기사 인가를 앞두고 있다. 업계에선 “CVC 등록 수요가 너무 몰려 신기사 인가 업무가 한참 밀려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호반건설(플랜에이치벤처스), 유진그룹(스프링벤처스), 금성백조(라이징에스벤처스), SGC에너지(SGC파트너스), 웰컴금융(웰컴벤처스)도 올해 창투사 등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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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성장 엔진 찾아라" 특명


일반 VC 운용사들은 대체로 한국벤처투자, 한국성장금융 등 정부 정책자금과 연기금, 금융회사 등으로부터 출자받아 벤처펀드를 만든다. 그렇다 보니 수익률을 우선시하고 정책적 목적에 따라 투자 범위 등이 제한되기도 한다.

하지만 CVC들은 회사 내부 자금을 가지고 운용하는 사례가 많다. 그룹사의 경우 계열사들이 일정 규모씩 출자한다. 상대적으로 투자 대상 선정이나 단기 수익률 부담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대신 그룹 전체 성장 목표에 맞춰 신기술을 확보하거나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분야를 찾는다.

CVC들의 투자를 보면 모기업의 성장 전략을 엿볼 수 있다. 신세계그룹 CVC인 시그나이트파트너스는 얼마 전 중고거래 플랫폼 번개장터에 250억원을 투자했다. 명품, 골프, 신발 ‘리셀’ 시장에서 강점을 지닌 중고 플랫폼과 신세계의 오프라인 유통이 합쳐지면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시그나이트파트너스는 그 밖에 여성 패션 앱 에이블리, 자율주행 배달 로봇 회사 뉴빌리티 등에 베팅하는 등 ‘라이프스타일’을 혁신하는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있다.

CJ 계열 CJ인베스트먼트는 지난달 출범하자마자 인공지능(AI) 학습 데이터 플랫폼 셀렉트스타, 정보 큐레이션 플랫폼 ‘라이너’ 운영사 아우름플래닛 등에 투자했다.

신성우 현대차 CVC팀 상무는 “사내 연구개발(R&D)과 기획 역량에 의존했던 과거와 달리 임직원들이 외부와의 협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점이 CVC 설립 열풍을 불러일으킨 배경”이라며 “수년 전만 해도 스타트업에 투자하려면 회사 사업부를 설득하는 게 어려웠는데, 이젠 사업부가 먼저 외부 기업 투자를 제안해 온다”고 말했다.

“모든 기업이 사실상 CVC”


국내 1호 CVC는 중소기업창업 지원법이 제정된 1986년 아세아시멘트가 설립한 우신개발금융(현 우신벤처투자)이다. 대성창업투자, 대상홀딩스의 UTC인베스트먼트, LG창업투자로 시작한 LB인베스트먼트, 종근당의 CKD창업투자,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등이 창투사 형태 CVC로 뒤를 이었다. 1997년 벤처기업육성특별법 제정으로 대기업의 CVC 진출 문턱이 낮아지면서 1999년 삼성그룹이 신기사 형태로 삼성벤처투자를 설립했다. 벤처붐이 일었던 2000년엔 코오롱인베스트먼트, 신한벤처투자의 전신인 네오플럭스, CJ인베스트먼트, 대림코퍼레이션, 한화기술금융 등이 대거 설립됐다. 2010년대 들어선 카카오(카카오벤처스), 네이버(스프링캠프), 직방(브리즈인베스트먼트), 무신사(무신사파트너스) 등 스타트업까지 CVC 설립에 가세했다.

업력이 오래된 CVC는 사실상 재무적 투자자 성격이 강하다. 실제 중견기업 가운데 금융 자회사로 키우기 위해 CVC를 설립하려는 곳들도 적지 않다.

CVC는 법적 정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기업이 대주주인 VC를 말한다. 정부는 대기업집단이 대주주인 VC를 CVC로 보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64개 대기업집단 가운데 15개 그룹사가 지주회사 체제 밖에 CVC를 보유 중이라고 분류했다. 한 VC 업계 관계자는 “공정위의 분류 기준은 CVC를 규제 대상으로 보는 접근법”이라며 “기업마다 신사업 투자 조직이 다 있을 정도로 스타트업 투자는 신사업 발굴을 위한 생존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36년 벤처투자 시장이 발전해오면서 CVC는 VC 세 곳 중 하나를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여신금융협회와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등록한 390개 VC를 전수조사한 결과 36.1%인 141곳이 기업이 대주주인 CVC로 집계됐다.

VC 업계에선 “기업 내 신사업 조직도 CVC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2000년부터 사내 벤처투자 조직이 CVC 역할을 하고 있다. GS리테일은 메쉬코리아(부릉), 쿠캣, 요기요 등 굵직한 스타트업에 수백억원대 투자를 집행한 바 있다.

구글, 보쉬, 보잉... CVC로 '기술 사냥'

해외에선 이미 CVC를 통한 벤처투자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구글,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회사들을 필두로 스타트업을 성장동력으로 삼는 대기업이 늘어나는 추세다. 정보기술(IT) 기업과 금융회사는 물론 보쉬(공구), 보잉(항공),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정유) 등 전통 제조업 분야 글로벌 기업들도 CVC를 통해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CB인사이트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벤처투자 시장에서 CVC를 통한 투자금액은 1693억달러(약 234조원)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2016년보다 네 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지난해 전체 글로벌 벤처투자금액(6430억달러)의 26%를 차지한다. 올해도 상반기까지 658억달러(약 91조원)가 CVC 투자였다. CB인사이트는 “시장 침체에도 불구하고 CVC는 여전히 역대 최대 수준의 투자를 집행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CVC 중에선 구글(구글벤처스)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구글벤처스는 지난해 122건의 투자를 집행하며 글로벌 CVC 중 투자 건수 기준 1위를 차지했다. 구글은 우버, 에어비앤비, 슬랙, 블루보틀 등 될성부른 스타트업을 떡잎부터 키워낸 것으로 유명하다. 구글의 지주회사 알파벳은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구글벤처스 외에도 ‘캐피털G’라는 CVC를 보유하고 있다. 캐피털G는 후기 단계 스타트업에 주로 투자한다.

이 밖에 마이크로소프트(M12), 인텔(인텔캐피털), 퀄컴(퀄컴벤처스) 등이 CVC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선 PC 제조사 레노버 계열 CVC 레전드캐피털, 일본에선 미쓰비시UFJ 계열 CVC 미쓰비시UFJ캐피털이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엔 블록체인 열풍을 타고 미국 최대 암호화폐거래소 코인베이스 CVC 코인베이스벤처스의 약진이 돋보인다는 평가다. 코인베이스벤처스는 올 2분기 28건의 투자를 집행했는데, 투자 건수 기준으로 구글벤처스와 함께 공동 1위에 올랐다.

해외에선 CVC 설립과 관련한 별다른 규제가 없다. 이 덕분에 기업들은 일찌감치 CVC를 통해 스타트업을 육성해왔다. VC 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서도 규제가 일부 완화돼 지주회사들의 CVC 설립이 늘어나고 있지만 부채 비율과 외부 출자자 비율 등 제약 조건이 있다”며 “더 많은 CVC가 등장해 스타트업 업계 마중물이 되기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김종우/허란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