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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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연기금들이 국내 간판 기업들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올해 주요 기업 주주총회에서 다수의 안건에 반대표를 던지며 세 과시에 나선 것이다. 이들 연기금들이 반대표를 던진 비율은 2년 전과 비교해 두 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증권가에선 한국 시장에 스튜어드십코드(기관자가의 수탁자 책임원칙)가 정착되고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데 따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같은 흐름은 앞으로 더 뚜렷해절 것이란 전망이 많다.

○반대표 던지기 시작한 글로벌 연기금

18일 한국경제신문은 세계 최대 국부펀드(작년 말 기준 자산 1조4000억달러)인 노르웨이중앙은행투자관리청(NBIM)이 가장 많이 투자한 국내 50개 기업(작년 말 기준·신규상장 등 비교불가능한 5개 종목 제외)의 최근 3년 간(2020~2022년) 정기주주총회 의결권 행사 내역을 분석했다.

그 결과 회사 측이 상정한 전체 안건(주주제안 안건 제외)에 대한 반대표 행사 비율은 2020년 4.35%(391건 중 17건)에서 2022년 12.28%(391건 중 48건)로 최근 2년새 세 배 가까이 급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유럽 내 3위 연기금(3142억달러)으로 꼽히는 네덜란드사회보장기금(PGGM)은 더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파악됐다. 2020년과 2022년 의결권 행사 기록이 모두 남아있는 70개 종목을 분석한 결과 반대표 행사 비중이 2020년 20.4%(505건 중 103건)에서 2022년 47.89%(497건 중 238건)로 두 배 이상 뛰었다. 국내 기업이 올린 주총 안건 중 절반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단 얘기다.

캐나다연금(CPP)과 네덜란드공적연금(ABP) 등 의결권 행사 내역이 공개되지 않은 다른 외국계 연기금도 세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최근 글로벌 연기금을 비롯해 국내·외 기관투자자들이 반대표를 행사하는 비율이 부쩍 늘었다"며 "국내에서 스튜어드십코드가 정착이 되고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외국 기관들도 국내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외국 큰 손 목소리 더 커질 것"

글로벌 연기금들은 국내 기업 이사회의 독립성 유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파악됐다.

올해 NBIM이 가장 많은 반대표를 던진 안건은 사외이사(20건) 및 사내이사 선임(12건)이었다. PGGM도 사외이사(50건)와 사내이사(42건) 선임 안건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이들 연기금은 특히 기업 총수의 이사 선임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보였다. 올해 NBIM과 PGGM은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을 모두 반대했다. 이사회의 독립성 유지를 이유로 댔다.

2년 전 NBIM과 PGGM은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의 사내이사 선임안건도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이들은 기업 감사위원 선임에 대해서도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고 있다. NBIM은 올해 에스엠엔터테인먼트가 내세운 감사위원 후보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혔다. 주주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유를 댔다. PGGM은 오뚜기의 이사회 안에 보상위원회 등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았다며 감사위원 선임을 반대했다.

PGGM이 가장 많이 반대표를 던진 건 재무제표 확정 안건(59건·이중 1건은 배당금 관련 반대)이었다. 감사보고서가 늦게 제출된 탓에 표결 전 감사보고서가 확정되지 않았단 것이다. 2년 전만 해도 PGGM은 주총 7일 전 감사보고서를 제출한 삼성SDS를 문제삼지 않는 등 해당 안건엔 한 건도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었다. 올해는 삼성SDS가 주총 9일 전 감사보고서를 제출했다며 반대표를 던졌다. 상법상 주총 일주일 전까지 감사보고서를 제출하게 돼 있지만 더 빠르게 제출하라고 압박한 셈이다.

외국 '큰 손'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국내 기업들도 발빠르게 대응하고 나섰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머로우소달리에서 근무한 오다니엘 이사를 IR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오 부사장은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 ISS와 글로벌 자산운용사 블랙록에서 임원으로 근무한 이력이 있다. ISS는 글로벌 의결권 자문시장의 60%를 차지하는 기관이다. 통상 외국인 주주들은 ISS의 권고를 그대로 따르는 분위기다. 삼성 안팎에선 오 부사장이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공격에 대비해 지배구조 개편 작업과 주총 전략 수립 등을 수행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증권가에선 글로벌 연기금을 비롯해 외국인 투자자들이 향후 더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코로나19 이후 개인투자자가 늘어나면서 한국에서도 주주권리 강화에 대한 요구가 커졌고 외국인 투자자 역시 이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며 "기업 대주주나 경영진이 주주이익에 대해 더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슬기 기자 surug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