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일트리 이용자들의 작품. 맨 오른쪽은 아이들이 그려준 임 대표의 이미지다. /테일트리 제공
테일트리 이용자들의 작품. 맨 오른쪽은 아이들이 그려준 임 대표의 이미지다. /테일트리 제공
“사실은 나는 / 재미있는 이야기 만드는 거 좋아하지만 / 그림을 많이 그리지 않았지 / 왜냐면 내가 / 잘 못 그린다고 생각했거든 / 그런데 테일트리를 하면서 말야 / 모두들 내 그림이 재밌다잖아 / 이제는 매주 만화를 그려 / 테일트리 친구들 보여주려고 / 자신감이 엄청 생겼어 / 테일트리 덕분이야.” (9살 J)

“이건 창의성 수업이 아니예요. ‘가족’이예요.” (테일트리 캠프에 참가한 한 어린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만든다는 교육 서비스는 많다. 아이들이 좋아하거나 열광하는 게임도 흔하다. 하지만 아이들의 ‘자존감’을 키워주는 서비스가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테일트리’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이 서비스는 온전히 아이들에게 ‘판’을 열어주는 데 집중한다. J가 그림을 공유한 것처럼, 아이들이 창작물을 공유하고 서로를 인정해주도록 하는 게 이 회사가 제공하는 서비스다.

◆ 아이들이 주인인 커뮤니티


임수미 테일트리 대표
임수미 테일트리 대표
임수미 테일트리 대표는 피터팬 같다. 아이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아이들의 세계를 굳이 어른의 각도로 재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세계를 동경한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가 만든 서비스가 여느 키즈 앱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원인이다.

테일트리는 아이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는 공동체다. 물론 부모들이 돈을 내고 회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단 회원이 되고 나면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창작물을 공유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서로를 인정하고 인정받는 경험을 쌓아 나간다.

임 대표는 “매주 오는 아이들은 마치 교회에 가듯 당연히 테일트리 활동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사정이 있어 활동을 못할 때는 오히려 상실감을 느낄 정도로 깊은 애정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회원 수는 천천히 늘어나고 있지만 참여하는 아이들끼리는 정말 ‘끈끈한’ 관계를 갖고 있어요.”

그는 20년이 넘게 실리콘밸리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 대부분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일했다. IT에 대한 애정이 큰 만큼, 그것이 어린이들에게 잘못된 경험을 주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아이들이 게임하고 소셜미디어에 너무 빠져드는 것처럼 좋지 않은 방향으로 IT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다고 이 세대의 아이들에게서 IT 기기를 떼어놓을 수도 없죠. 어떻게 이 힘을 좋게 써야할 지를 오래 고민했습니다.”

◆ 교통사고 계기로 결심한 사업

임 대표는 실리콘밸리가 어떤 곳인지 모르고 실리콘밸리에 온 드문 사례다. 미국에서 정치학과 프랑스어를 전공한 그는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유니세프 같은 곳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정도의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자리잡은 언니를 따라 실리콘밸리 지역에 왔다가 한국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던 반도체 회사(네오매직)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이후 지벨(오라클이 인수), 매크로미디어(어도비가 인수), 삼성 등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프로덕트 매니저와 신규사업 개발을 담당했다. ”실리콘밸리의 순풍을 등에 업고 비교적 순탄하게 세상을 누빈 셈”이라고 했다.

중국계 게임사(파파야모바일)의 비즈니스 총괄로 자리를 옮겨 전 세계로 출장을 다니던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가던 길에 대형 사고가 났다. 그를 태우고 가던 택시기사는 사망했고 그는 척추가 여러 곳 부러졌다. 3개월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석달 만에 재활치료를 위해 물에 들어갔다가 두 시간 만에 기흉이 생겨 다시 자리에 눕는 처지가 됐다. 재활 후 복직을 했지만 역시 회사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어요.”

당분간 쉬겠다는 생각으로 MIT에서 경영대학원(MBA)에 등록했다. 그는 “기대와 달리 요구사항이 많아 쉴 수는 없었지만, 늘 출장을 다니며 바쁘게 살던 삶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계기였다”며 “오랫동안 즐겁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돌이켰다. 그는 지금도 오랫동안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이 어렵다. “척추에 경첩이 다섯 개 들어가 있다”고 했다.

이 무렵 구상한 것이 테일트리다. 2012년에 사고가 일어났으니 그가 2020년 초 실제로 테일트리를 시작하기까지는 8년이 걸렸다. 이 사이 여러 스타트업을 경험했다. 아이디어가 뭉근하게 끓듯 마음 속에서 조금씩 다듬어지는 시기였다.

◆ “아이들이 긍정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곳”

임 대표는 “모든 아이는 천재적인 창의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며 “교육을 받고 어른이 되어가며 그러한 창의성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화 시대의 경쟁적 교육은 환경위기 등에 직면하는 미래에는 맞지 않고, 협동적이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훨씬 필요하다”고 했다.
임수미 대표가 샌프란시스코의 한 학교를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임 대표는 공교육 분야에 테일트리를 제공하는 협력 관계를 구상하고 있다.  /테일트리 제공
임수미 대표가 샌프란시스코의 한 학교를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 임 대표는 공교육 분야에 테일트리를 제공하는 협력 관계를 구상하고 있다. /테일트리 제공
“아이들이 자기 것(작품)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며 ‘이거 좋네, 더 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게 하고 ‘네 것도 잘 했다’며 다른 사람을 칭찬해 주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싶었어요.”

테일트리는 앱, 주 단위 캠프와 월 단위 캠프(모두 온라인)를 각각 운영한다. 앱에 가입하는 단계(Seedlings), 매달 열리는 캠프에 참여하는 단계(Roots), 매주 열리는 캠프까지 참여하는 단계(Branches)로 각각 구성돼 있다. 각 단계별로 월 2.99~60달러를 받는다. 8명 안팎의 친구들이 하나의 그룹이 되어 매주 만나서 자기들이 만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임 대표는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좋은 경험 뿐만 아니라 싫은 경험도 이야기한다”고 했다. 특히 코로나19 기간 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이 앱을 통해 교류하고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을 수 있었다.

매월 열리는 캠프는 게스트 스피커를 초청해 새로운 자극을 제공한다. 로블럭스의 프로덕트 매니저에게 게임 플랫폼이란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고 하거나, 아이슬란드 초콜렛 회사 대표를 초청해 초콜렛 제조 과정을 말해달라고 하는 식이다.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의 아이들이 주로 오지만 한국이나 필리핀에서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에게 도전 과제를 주지만 과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 거나 다른 것을 해도 된다. 귀여운 캐릭터들을 통해 자신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준다. “부모들은 바쁘니까 집에서 아이들에게 충분한 피드백을 주기 힘들어요. 친구들이 같이 웃어주고, 재미있다고 말해주는 것이 이들에겐 최고죠. 자신이 참여하는 매주 목요일 테일트리 캠프를 ‘맛이 가는 목요일(Crazy Thursday)’이라고 부르며 고대하는 친구들도 있어요. 5~13세 정도가 대상인데, 나이가 들어도 나가기 싫어해요.”
"아이 자존감=친구의 인정"…'찐' 어린이 커뮤니티 만드는 테일트리[실리콘밸리의 진주들]

◆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클 것”

임 대표는 빠른 성장을 경계한다. 공동 창업자인 맷 해거(Matt Hagger)와 회사를 만들 때부터 다짐한 부분이다. “스타트업 업계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투자를 받고, 마일스톤을 찍고 엑시트를 하는지 많이 봤지만 그런 식의 덩치 키우기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투자자의 속도에 맞추지 않고 우리 페이스대로 성장하려고 한다”고 그는 여러 번 강조했다.

“NFT나 메타버스 등의 트렌드가 게임처럼 돈을 벌기 위한 트렌드가 되어서는 안 되고, 기술을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는 게 임 대표의 신념이다.

그는 테일트리가 다양한 방법으로 응용될 수 있다고 했다. “작년에는 산호세의 공립학교에서 매주 한 시간씩 수업을 진행했는데, 평소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친구들이 입을 열고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을 경험했어요. 맞고 틀린 게 없고, 어떻든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이들의 태도를 바꾼 거죠.” 앱 안에서 전문가와 아이들이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거나, 다양한 구독모델로 확장해 가는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

“테일트리를 통해 교류하는 아이들이 백만명쯤 되면 물론 좋겠지만, 사실은 덩치가 크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적은 수라도 좋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아이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거예요.”

테일트리 이용자 사샤(12세)가 만든 테일트리 노래. /테일트리 제공
테일트리 이용자 사샤(12세)가 만든 테일트리 노래. /테일트리 제공


실리콘밸리=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