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카카오, 셀트리온 등 글로벌 기업을 탄생시킨 코스닥시장의 정체성은 역동성이었다. 모험기업과 모험자본을 연결하는 창구로서 혁신산업을 주도해왔다. 하지만 미래 가치에 투자해야 할 코스닥시장 상장사들이 단기 실적에 골몰하고 있다. 4년 연속 영업손실을 내면 관리종목으로 지정되고, 5년째에는 상장폐지 대상이 되는 규정 때문이다. 일부 기업은 본업과 관계없는 사업을 인수하며 상폐 위기를 피하고 있다. 바이오 기업이 핫팩을 제조하고, 반도체 기업이 쌀을 유통하는 일이 코스닥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급증하는 관리종목·상폐 사유

반도체·바이오社가 쌀·화장품 장사하는 까닭
10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실적결산 이후 관리종목 지정 또는 상장폐지 사유가 발생한 코스닥시장 상장사는 올 들어 40개로 집계됐다. 대부분 4개 사업연도 이상 영업손실을 낸 기업이다. 작년 33건, 2019년 24건과 비교해 대폭 늘었다. 코스닥상장규정 제28조와 38조에 따르면 최근 4개 사업연도 연속 영업손실이 발생하면 관리종목으로 지정되고, 5년 연속 적자 시 상폐 사유가 발생한다. 투자자들이 부실기업 투자로 피해를 보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에서 생긴 규정이다.

기업들은 상장폐지를 피하기 위해 부업에 나서고 있다. 코스닥시장 시가총액 8위 신약 개발사 에이치엘비는 지난달 체외진단 의료기기 업체 에프에이를 1019억원에 인수했다. 내년에 영업이익을 내야 관리종목 지정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인수로 에이치엘비는 내년부터 영업이익을 낼 수 있게 됐다.

쿠팡에 쌀 파는 반도체 기업

본업과 관련이 없는 사업에 진입하는 사례도 많다. 2차전지 솔루션 업체 에이치앤비디자인은 448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결정했다. 조달 자금을 건강기능식품 사업 강화에 사용한다는 계획이다. 에이치앤비디자인은 2019년과 작년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관리종목으로 지정된 반도체 업체 엔시트론은 연초 쿠팡에 쌀을 수매하는 사업에 진출했다. 신약 개발사 크리스탈지노믹스는 2018년 국내 1위 핫팩 제조사 즐거운쇼핑을 사들였다. 이들 기업 모두 상장폐지를 피하기 위한 조치라는 해석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상장규정이 코스닥 혁신을 가로막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 코스닥시장 상장사 대표는 “신사업을 시작해 이익을 내기까지 최소 7년이 걸리는데 4년 만에 실적을 내라는 것은 미래 사업에 투자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관리종목 지정만으로 존립이 위태로워진다는 의견도 있다. 다른 상장사 관계자는 “관리종목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자금 조달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고 전했다.

특례상장 기업도 부업 알바

미국 중국 등에서는 상장폐지를 시장 판단에 맡기고 있다. 벤처기업 거래소인 미국 나스닥은 주가가 1달러 미만으로 30거래일 연속 거래되면 경고 조치를 받고, 이후 90일 내 주가가 열흘 연속 1달러를 넘지 못하면 상장폐지된다.

중국판 나스닥인 창업반(ChiNext)은 주가가 1위안 미만 또는 시가총액이 3억위안(약 550억원) 미만으로 20거래일 연속 거래되면 상폐 사유가 발생한다. 2년 연속 매출이 1억위안에 미달하면 퇴출된다는 규정이 있지만 매출이 나지 않는 성장기업은 면제된다.

국내에서도 면제 제도가 있지만 효과가 크지 않다. 기술성장, 이익미실현 등 특례상장 기업은 영업손실이 관리종목 지정 사유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상장 5년 이후부터 연 30억원 넘는 매출을 내야 한다. 2년 연속 미달하면 상장폐지 실질심사 대상이 된다.

이 때문에 특례상장 기업들도 미리부터 부업을 준비한다. 아미코젠, 바이오리더스 등은 건강기능식품 사업을 한다. 강스템바이오텍, 안트로젠 등은 화장품을 생산해 판다. 분자진단기업 캔서롭은 장례식장을 소유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이 된 셀트리온도 ‘셀트리온뷰티’라는 쇼핑몰을 운영한다.

박의명 기자 uimy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