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독점 기업'...이 회사 없인 반도체 발전도 없다
세계 시장을 홀로 독점했지만, 그 누구도 독점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거나 규제하지 못하는 회사가 있다. 반도체 극자외선(EUV) 장비를 생산하는 네덜란드 회사 ASML(ASML) 얘기다.

이 회사의 장비를 구하느냐 여부가 반도체 회사들의 생존을 결정하는 상황이 됐다. 만드는 대로 팔리면서 생산능력 확충과 함께 실적도 우상향하고 있다. 주가는 더 가파르게 오름세를 타고 있다.

◆주가는 5년 만에 8배
ASML은 미국예탁증서(ADR) 형태로 나스닥시장에 상장돼 있다. 종목명은 ‘ASML Holding NV ADR’, 티커명은 ASML이다.

ASML은 2021년 9월 15일 종가 889.33달러로 사상 최고가를 썼다. 이후 테이퍼링(자산 매입 축소) 등 우려로 조정받아 700달러 후반대로 밀렸다. 하지만 2021년 들어 9월까지 주가 상승률만 70%에 가깝다. 최근 5년간 여덟 배 가까이 뛰었다. 지난 5년간 큰 조정 없이 주가가 우상향했다. 경기순환(시클리컬) 업종인 반도체 주가로서는 이례적인 움직임이다.

노광장비는 반도체 원재료인 웨이퍼 위에 빛을 쬐어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장비다. 대부분 제조사는 불화아르곤(AaF) 노광장비를 사용하고 있다. 아르곤과 플루오린 가스를 혼합해 빛을 방출한다. 이때 파장은 193㎚(1㎚=10억분의 1m)다. EUV 파장은 13.5㎚에 불과하다. 방출하는 빛의 파장이 작을수록 세밀한 회로를 새길 수 있다. 공정 효율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개발부터 양산까지 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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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V 노광장비 개발의 역사는 그야말로 장편드라마에 가깝다. 1984년 당시 전자 대기업 필립스와 반도체 장비 제조사인 ASMI가 협력해 ASML을 설립했다. 1997년 들어 EUV를 이용한 방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부터 투자한 금액만 80억달러다. 글로벌 협력이 주효했다. 독일과 미국의 기계기술과 일본의 화학기술이 합쳐져 시행착오 끝에 2014년에야 양산이 시작됐다. 2016년 6대, 2017년엔 11대를 출하했다.

오랜 연구 끝에 개발한 기술인 만큼 ASML이 관련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기술 유출을 막고자 해당 장비 운용에도 ASML 직원들이 관여할 정도다.

◆만드는 대로 팔리네
EUV 노광장비는 구조적으로 수요가 늘고 있다. EUV는 7나노, 5나노 등 미세공정에 유리하다. 비슷한 성능에도 전력 효율을 높일 수 있다. 고성능·저전력을 요구하는 인공지능(AI) 반도체에 필수 요소다. 그래픽처리장치(GPU), 중앙처리장치(CPU), 신경망처리장치(NPU),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 등 성능 향상에 필수 기술이다. 미국 투자은행 에버코어ISI의 CJ 뮤즈 애널리스트가 “대부분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이라고 평가한 이유다.

미세공정이 중요한 상황도 EUV 노광장비가 반도체 업체에 필수로 여겨지는 이유다.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대만의 TSMC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뿐 아니라 중국 내 반도체 업체들도 이 장비를 구하기 위해 혈안이다. 파운드리 시장의 구조적 성장세와 이 회사의 매출이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다. 기존 노광장비를 팔았던 ASML 매출에서 EUV 노광장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들어 기존 장비 매출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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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량은 제한적이다. 한 대에 2000억원 가까이 하는 이 장비는 크기도 커서 옮길 때 대형 항공기를 동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0년에는 31대, 2021년엔 40대를 생산했다. 2022년에는 55대, 2023년 이후에는 60대 이상으로 늘린다. 생산량이 늘어나는 대로 매출도 증가하고, 이에 따라 주가도 오르는 구조다.

세대교체도 예정돼 있다. 2나노급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하이(High)-NA EUV’를 개발할 예정이다. 대당 가격은 3500억원 이상으로, 2025년부터 양산할 계획이다.

주가 상승 이어질까
문제는 주가 상승세가 지속될지 여부다. 구조적으로 성장하는 산업은 먼 미래의 실적을 현재에 반영하는 특성이 있다. 이 때문에 ASML의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40배가 넘는다. 반도체 장비주 가운데 단연 높은 수준이다. 그만큼 장기 기대가 이미 주가에 반영됐다는 뜻이다. 그사이 예상치 못한 리스크가 발생하면 주가 하락폭이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증권업계는 이 같은 상승세가 이어질 것으로 본다. 두 가지 근거가 있다. 우선 이익 구조가 달라지고 있다. EUV 노광장비의 독점력은 ASML이 가격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의미다. 이 덕에 주당순이익(EPS)은 2020년 8.8달러에서 2021년 12.5달러, 2022년 15.2달러로 급격히 오를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2022년 17~18달러 수준의 EPS 달성이 가능하다고 본다. 수익성 개선은 높은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수준)을 정당화하는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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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잉여현금흐름이 쌓이면서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확대 등 주주환원책도 강화할 예정이다. KB증권에 따르면 2021년 41억7900만달러 수준인 잉여현금흐름은 2023년 60억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다. 김세환 KB증권 연구원은 “꾸준한 주주환원과 반도체 수요에 따른 EPS 증가는 장기적 주가 상승을 이끌 것”이라며 “성장성을 고려하면 주가는 오히려 저평가 상태”라고 설명했다.
'흔들리지 않는 독점 기업'...이 회사 없인 반도체 발전도 없다
고윤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