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선수단 서비스로 국제사회 첫선…'달러 제국' 도전무기 활용 가능성
한국도 우선 영향권 가능성…개인 소액결제부터 기업 대금 등으로 확대 전망
[디지털 위안화] ⑤ 베이징올림픽 시작으로 '대외팽창' 예고(끝)
'사드 보복' 전까지 중국인 관광객이 넘쳐나던 서울 명동 거리의 상점이나 시내의 여러 대형 면세점에서 중국 전자결제 서비스인 알리페이(즈푸바오·支付寶)나 유니언페이(銀聯) 카드 결제가 가능하다는 안내 문구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중국 관광객들이 관광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던 명동 롯데백화점 앞 인도에서 간이 매대를 운영하는 상인이 한국 돈이 없는 중국 관광객에게 더러 위안화 현금을 받고 상품을 파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 고객이 더 쉽게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이 이익이기에 굳이 '중국 돈'이라고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것처럼 앞으로 예상보다 빨리 한국 땅에서도 중국의 법정 디지털 화폐인 디지털 위안화(e-CNY)가 쓰이는 장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국이 자국 내부에서만 쓰이던 디지털 위안화를 나라 밖으로 진출시킬 채비를 서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 벌써 서울 인구만큼 쓰는 '디지털 현금'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 도입 준비는 거의 막바지에 달해 언제든 공식 도입 선언이 가능한 수준으로 평가된다.

상하이(上海), 선전(深圳), 쑤저우(蘇州), 베이징(北京) 올림픽 개최지 등 중국 전역 11개 시범 지역에서 대부분 사람이 원하기만 하면 은행을 방문해 전자지갑을 만들어 디지털 위안화를 일상에서 폭넓게 사용할 수 있다.

판이페이(范一飛) 인민은행 부행장은 8일 국무원 신문판공실 주최로 열린 브리핑에서 현재 인민은행 승인을 거쳐 디지털 위안화를 쓰는 '화이트 리스트'에 오른 이용자가 1천만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인민은행이 상시로 진행 중인 비공개 시험 참여자 규모를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미 중국에서 서울 전체 인구만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디지털 위안화를 쓰고 있다는 얘기다.

[디지털 위안화] ⑤ 베이징올림픽 시작으로 '대외팽창' 예고(끝)
한국은행 베이징 사무소는 지난 4월 보고서에서 "지난해 말부터 진행된 디지털 위안화 지역별 릴레이 테스트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디지털 위안화 사용 범위가 홍콩 등 역외까지 확대됐다"며 "도입 준비가 기술적·실용적 측면에서 거의 완료됐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2014년 연구·개발을 시작한 이래 비교적 조용히 디지털 위안화 도입 준비를 해온 중국은 내년 2월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디지털 위안화를 나라 안팎에 대대적으로 선전할 채비를 하고 있다.

판 부행장은 "우리는 계속해서 (디지털 위안화) 시험 범위를 확대할 것"이라며 "베이징 올림픽은 다음의 핵심 시험 영역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하는 외국인 선수단이 디지털 위안화를 쓸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외국 선수들이 각자 스마트폰으로 디지털 위안화를 충전해 선수촌 일대의 상업시설에서 쓰는 모습을 통해 세계인에 디지털 위안화를 강렬하게 각인시키려는 것이 중국의 복안이다.

◇ 디지털 위안화 국제무대 데뷔로 '달러 제국' 도전장
주목할 대목은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디지털 위안화의 '대외 진출'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린다는 점이다.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한 디지털 위안화의 국제무대 데뷔는 중국이 미국의 '달러 제국'에 정식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그간 중국은 대외적으로는 디지털 위안화가 자국 내 제한적인 소매 결제용의 성격이 강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다분히 외부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리보(李波) 인민은행 부행장은 지난 4월 보아오포럼에서 "당장은 주로 국내 사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달러화나 다른 국제통화를 대체하려는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를 무기 삼아 달러 중심의 국제 경제 질서에 균열을 내려 하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중국 사회과학원 황궈핑(黃國平) 투융자연구센터 주임은 잡지 은행가(銀行家) 논문에서 "디지털 위안화 출현을 계기로 국제 통화 및 금융 시스템에서 달러화의 주도적 지위가 약해질 수 있어 위안화 국제화에 동력과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며 "유관국이 디지털 위안화 사용을 통해 미국과 유럽 등이 국제 결제·청산 시스템 통제권을 이용해 부당하게 내린 제재를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 밝혔다.

에드윈 라이 홍콩과기대 교수도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 인터뷰에서 "중국은 달러 중심 금융 시스템 의존도를 줄이려고 더 많은 사람이 위안화를 쓰기를 희망한다"며 "중국은 국제적으로 더욱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갖기를 원하는데 한 가지 방법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위안화를 교환이나 외화 보유 수단으로 더 많이 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중 신냉전 시대에 접어들어 중국은 미국 주도의 달러 중심 국제 금융질서가 자국에 매우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고 뼈저리게 인식하게 됐다.

[디지털 위안화] ⑤ 베이징올림픽 시작으로 '대외팽창' 예고(끝)
미국 정부의 제재 대상이 된 홍콩 정부 수반인 캐리 람 행정장관이 미국의 2차 제재(세컨더리 보이콧)를 두려워한 홍콩 금융기관들의 외면으로 은행 계좌와 신용카드를 쓰지 못해 현금다발로 월급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현실은 현재 국제경제 체제 속에서 미중 간의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중국은 오랫동안 위안화 국제화를 추진하면서 '달러 제국'의 영역 밖에서 '독자 지대'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팡싱하이(方星海) 중국 증권감독위원회 부주석(차관)은 작년 6월 공개 포럼에서 "위안화 국제화는 향후 외부 금융 압력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미리 계획을 마련해야 하고, 우회할 수 없는 과제"라고 강조했는데 이는 중국이 미중 신냉전의 각도에서 위안화 국제화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 디지털 위안화, 일대일로 타고 빠르게 확산하나
단기적으로 디지털 위안화는 중국 안팎에서 개인 위주의 소액 소매 결제 기능을 중심으로 쓰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러나 중국은 중·장기적으로 국제 무역·결제 업무에서 사용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인민은행은 지난 2월 홍콩, 태국, 아랍에미리트(UAE)가 참여한 법정 디지털 화폐 역외 결제 모색 국제 프로젝트에 가입했다.

또 지난 4월께부터 외국은 아니지만 특별행정구여서 경제 체제가 본토와는 다른 홍콩 시민들을 상대로 첫 디지털 위안화의 역외 사용 시험도 했다.

중국 디지털 위안화는 기존의 통화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달러 제국'의 핵심 인프라 격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의 영향에서 벗어난 독자 영역을 구축하려는 중국에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미국 정부의 제재가 다른 나라에 강력한 효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주된 이유는 SWIFT를 통해 특정 국가를 국제 금융망에서 배제해 고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으로 SWIFT를 거치지 않고 디지털 위안화를 활용한 '직거래'가 늘어난다면 미국 제재의 힘이 그만큼 약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디지털 위안화가 예상보다 빨리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협력국 등 중국의 경제 영향권에 깊숙이 들어온 나라들에 확산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디지털 위안화] ⑤ 베이징올림픽 시작으로 '대외팽창' 예고(끝)
국제결제은행(BIS)의 디지털 화폐 연구 조직인 이노베이션 허브는 지난 7일 보고서에서 주요국 중앙은행이 발행한 법정 디지털 화폐가 다른 나라의 일상적 거래에 활용돼 해당국의 통화 주권에 부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면서 과거 인플레이션이 심했거나 통화 시스템의 신뢰가 부족한 국가에서 '통화 대체' 위험이 더욱 크다고 진단했다.

강력한 구매력 역시 잠재적으로 디지털 위안화 해외 확산을 도울 수 있는 요인이다.

작년 7월 영국 석유회사인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은 위안화를 받고 중국에 원유 300만 배럴을 인도했다.

글로벌 메이저 석유 회사가 달러화 대신 위안화로 석유 판매 대금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위안화 국제화의 진전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회자했다.

이처럼 중국이 향후 정책적으로 디지털 위안화를 이용한 국제 결제를 밀어붙인다면 세계 여러 나라의 기업은 물론 경제 교류 규모가 특히 큰 한국 기업도 압력에 노출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국의 한 전자업계 관계자는 "결제 방식을 정할 때는 제품을 사는 중국 바이어 측의 요구가 크게 반영되는 편"이라며 "반도체 등 주요 제품의 대중 수출도 과거 홍콩을 경유하는 달러 결제 방식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중국 측의 요구로 위안화 직접 결제 방식으로 바뀐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조고운 대외경제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지난 7일 보고서에서 "중국 당국이 디지털 위안화 국경간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아직 테스트 초기 단계에 있는 프로젝트로 단기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면서도 "향후 디지털 위안화를 사용한 국경 간 결제는 일대일로 연선 국가를 대상으로 시범 적용하고 단계적, 점진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