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들의 현금 보유액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불황에 대비해 급하게 자금을 끌어모았으나 예상과 달리 영업실적이 훨씬 좋아져서다. 저금리 속에서 자산 운용에 어려움을 겪는 은행들이 기업 예치금을 사절하는 기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달 26일 기준 기업 예금은 총 17조900억달러로 집계됐다. 불과 2개월 사이 4110억달러 증가했다. 과거 20년간의 예금 증가 속도 평균치 대비 네 배 가까이 빠른 속도다.

기업들의 총자산도 급증 추세다. 상위 600대 기업의 자산은 작년 말 기준 8438억달러로, 1년 전보다 10.0% 증가했다. 지난달 말엔 이 수치가 8733억달러로, 5개월 만에 295억달러 더 늘었다는 게 금융정보업체인 클리어워터 애널리틱스의 분석이다.

작년부터 비핵심 자산을 매각하는 한편 채권 발행으로 현금을 조달해 놨는데, 우려한 비상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기준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낮추고, 기업 채권을 무제한 매입하기로 한 양적완화 정책도 일조했다. 기업 역시 외부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현금을 중시하는 비상 경영 체제를 중단하지 않고 있다.

은행들은 예금 받기를 꺼리고 있다. 그 돈을 운용해 수익을 낼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다. 게다가 예금을 받을 경우 최소 3%씩 떼 Fed에 무수익 자산으로 재예치해야 한다. Fed 자료를 보면 미국 은행권의 전체 예금 대비 대출 비중은 지난달 말 61%를 나타냈다. 팬데믹(대유행) 직전이던 작년 2월 75%에서 14%포인트나 줄었다. 은행의 핵심 수익지표인 기업 순이자마진은 올 1분기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기업 예금을 받아놓고 손실을 보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은행은 거래 기업들을 조심스럽게 접촉해 “예치금을 사업에 재투자하거나 다른 은행으로 옮기라”고 압박하고 있다고 WSJ가 전했다. 뉴욕에 본사를 둔 BNY멜론은행의 에밀리 포트니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예치금 이전 등에 대해 기업 고객과 지속적으로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조재길 특파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