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탐구

AI·해외 공략…미래 투자도 천천히 한걸음씩

47세에 '최연소' 메이저 운용사 CEO
외환·주식·채권 모두 거친 베테랑
20년째 CEO…'직업이 운용사 사장'
“변화가 중요하죠. 하지만 조직을 너무 빨리 바꾸려고 하면 구성원들이 지치거나 힘들어해요. 큰 조직일수록 천천히 한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조재민 KB자산운용 사장은 느긋하다. 좀처럼 재촉하지 않는다. 결과물을 빨리 내놓으라고 소리치지도 않고, 펀드 수익률이 일시적으로 좋지 않다고 질책하지도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보통 사장까지 오른 사람은 ‘빨리빨리’가 몸에 밴 경우가 많은데, 조 사장은 특이한 케이스”라고 말한다. 느긋하지만 가만히 쉬는 법이 없다. 오히려 ‘워커 홀릭’에 가깝다. 약속이 없으면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뭔가를 고민하고, 개선책을 찾는다.

KB운용도 이런 그를 닮았다. 느리지만 꾸준히 변화했다. 그가 처음 KB운용 사장으로 부임한 2009년 5월 운용자산(AUM)은 19조원에 불과했다. 지금은 80조원이 넘는다. 업계 3위권이다. 가치 투자의 명가라는 평을 듣고 있고 중국 펀드로 유명한 운용사가 됐다.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질타한다고 펀드 수익률 안 올라”

1999년 마이다스에셋자산운용을 공동 창업해 사장으로 있던 조 사장은 2009년 KB자산운용 사장으로 영입됐다. 파격이었다. 당시 나이는 마흔일곱. 주요 운용사 최고경영자(CEO)로는 최연소였다. KB금융지주는 조 사장을 영입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유행을 좇지 않고 장기 전략에 충실한 투자 철학으로 마이다스에셋자산운용을 펀드 매니저 이직률이 업계에서 가장 낮고, 운용 수익률은 상위권인 회사로 성장시켰다. KB자산운용을 업그레이드시킬 것으로 기대한다.”

조 사장 영입은 성공적이었다. 당시 KB운용의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금융지주 계열사인 까닭에 채권 운용 규모는 컸지만, 주식은 미미했다. 조 사장은 2009년 11월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에서 일하던 젊은 펀드매니저 최웅필 현 KB운용 밸류운용본부장을 데려와 주식운용팀장에 앉혔다. 그렇게 탄생한 ‘KB밸류포커스’는 약 3년 만에 누적 수익률 100%를 올리며 간판 펀드가 됐다.

최 본부장의 운용 능력과 조 사장의 뒷받침이 합쳐진 결과였다. 2010~2011년은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 전성시대’였다. 이들 종목에 집중 투자한 펀드와 투자자문사만 잘나갔다. 어지간한 운용사 CEO라면 “우리는 왜 차화정 안 담냐”, “7공주(LG화학·SK하이닉스·제일모직·삼성SDI·삼성전기·삼성테크윈·기아자동차) 안 담냐”며 압박했을 만했지만 조 사장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차화정 시대가 갑자기 저물자 많은 펀드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에스엠, CJ제일제당 등 저평가된 가치주 찾기에 주력했던 KB밸류포커스는 수익률이 급등했다. ‘KB운용 펀드는 기다리면 수익률이 다시 올라온다’는 인식이 확산한 계기가 됐다. 이는 ‘KB중소형주포커스’, ‘KB퇴직연금 배당40’ 펀드의 히트로 이어졌다.

조 사장은 “펀드가 언제나 좋은 수익률을 올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질타한다고 펀드 수익률이 오른다면 이 세상에 수익률이 나쁜 펀드가 있을 수 없겠죠”라고 했다. 그래서 KB운용에선 3년 수익률을 중심으로 펀드매니저 성과를 평가한다.

“휴가 마음대로 가라”

2017년 업계는 또 한 번 놀랐다. 2013년 KB운용 사장에서 물러나 KTB자산운용 대표로 갔던 조 사장이 4년 만에 다시 KB운용 사장으로 복귀했기 때문이다. 성과로 보면 2013년에도 물러날 이유는 없었다. KB금융지주 회장이 바뀐 뒤 ‘계열사 CEO 물갈이’ 차원에서 교체됐다. 2017년 복귀는 2014년 말 새로 KB금융지주 회장을 맡은 윤종규 회장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 회장은 KB지주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일하며 조 사장이 어떻게 KB운용을 키웠는지 가까이서 지켜봤다.

운용업계 트렌드가 주식만 잘하면 됐던 것에서 채권, 외환, 대체자산 등 글로벌 자산 전체를 아우르는 방향으로 바뀐 점도 조 사장의 몸값이 더 오른 요인으로 꼽힌다. 조 사장은 1988년 씨티은행 외환 딜러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1996년 엥도수에즈은행에선 채권을, 1999년 마이다스에셋운용에선 주식을 운용했다. 외환·주식·채권을 모두 거친 유일한 운용사 CEO인 셈이다.

KB운용 사람들은 조 사장이 돌아온 후 달라졌다고 말한다. 한 임원은 “옛날엔 회의를 하면 상품이든 마케팅이든 조 사장이 직접 꼼꼼하게 다 챙겨서 담당 본부장들이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며 “지금은 큰 주제를 하나 정해 논의하는 식이어서 회의에 대한 부담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 사장은 “리더가 디테일한 부분까지 챙기면 직원들이 주체적으로 일하는 데 방해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휴가도 마음대로 갈 수 있게 바꿨다. 본부장들의 휴가 결재 라인에서 자신을 빼버렸다. 그는 누가 휴가 가 있는지 모른다. 눈치 안 보고 휴가를 갈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일반 직원은 본부장 결재 없이 휴가를 간다. 출퇴근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유연 출근제도 도입했다.

“유능한 펀드매니저가 일하고 싶어 하는 회사 돼야”

운용업은 결국 사람 장사라는 게 조 사장의 지론이다. “음식점은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게 핵심 역량입니다. 그러려면 유능한 요리사를 데리고 있어야 하죠. 운용사는 좋은 수익률이 핵심 역량이에요. 그렇게 하려면 먼저 유능한 펀드매니저들이 일하고 싶은 회사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충분한 보상, 성장 비전, 합리적인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젊은 직원일수록 회사가 성장 비전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다. 조 사장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자산배분 회의에만 참석할 뿐 운용에 간섭하지 않는다. 운용은 본부별로 자율적으로 한다.

KB운용은 지금도 변화 중이다. 하나는 인공지능(AI) 투자다. 국민은행이 지난해 내놓은 AI 자산관리 솔루션 ‘케이봇쌤(KBot-Sam)’의 엔진을 KB운용이 개발했다. 여기에 쓰인 AI 알고리즘 ‘앤더슨’을 기반으로 최근 ‘KB올에셋AI솔루션’ 펀드를 내놨다. 다른 하나는 해외 투자다. 글로벌본부의 투자 인력을 두 배로 늘리고 중국 상하이와 싱가포르, 베트남 지사를 세웠다. 미래를 위한 포석이다.

그는 2000년 마이다스에셋운용 대표를 맡은 이후 20년 넘게 운용사 사장만 하고 있다. 업계 최장수 CEO다. 그동안 큰 사건·사고도 없었다. 그는 “리스크와 컴플라이언스 부서가 제 할 일을 할 수 있게 놔뒀을 뿐”이라고 말했다. 상식적인 답변이지만 각종 사고로 운용업계에 대한 불신이 커진 지금 그 울림은 더 크게 들렸다.

■ 조재민 KB자산운용 사장

△1962년 부산 출생
△1985년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1987년 미국 뉴욕대 경영학 석사(MBA)
△1988년 씨티은행 서울지점
△1996년 크레디아그리콜 엥도수에즈 홍콩지점
△1998년 스탠다드은행 홍콩지점
△1999년 마이다스에셋자산운용 공동 창업
△2000년 마이다스에셋자산운용 사장
△2009년 KB자산운용 사장
△2013년 KTB자산운용 사장
△2017년 KB자산운용 사장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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