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등급 ‘AA’ 미만인 비우량 회사채 시장이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채권 발행을 위해 사전청약에 나섰던 기업들이 목표액을 채우지 못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얼어붙은 투자심리는 정부가 비우량 회사채 매입을 위해 10조원 규모로 조성하는 특수목적기구(SPV)가 본격적으로 가동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쉽게 풀리지 않을 전망이다.

한화건설 사전주문 '제로' 쇼크…회사채 시장 양극화 극심
22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한화건설(신용등급 A-)이 1000억원 규모 회사채 발행을 위해 이날 기관투자가들을 상대로 진행한 수요예측(사전 청약)에 매수 주문이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최근 건설업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으로 실적 부진에 시달리자 투자자들이 극도로 몸을 사린 결과다. 이에 따라 인수단으로 참여한 산업은행이 400억원을 인수하고, 나머지 600억원은 발행 주관사와 인수증권사들이 나눠 떠안는다.

지난 21일 1500억원을 목표로 회사채 수요예측에 나섰던 현대건설기계(A-) 역시 불과 50억원의 수요만 확보하는 데 그쳤다. 메리츠금융지주(A+)도 20일 700억원어치 영구채 발행을 위해 사전청약을 받았다가 110억원이라는 실망스러운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두 회사 모두 평소보다 금리를 크게 높였음에도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정부 지원으로 우량등급 위주로 회사채 시장의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면서 자금시장이 큰 고비는 넘겼지만 신용도 A급 이하 발행시장 분위기는 여전히 ‘냉골’이다. 코로나19가 대유행 국면으로 치달은 지난 3월 이후 나온 A급 이하 회사채의 청약 경쟁률은 대부분 2 대 1에도 못 미친다. 기업실적 악화가 현실화하자 기관투자가들이 발을 뺀 탓이다. 한국거래소 등에 따르면 지난 1분기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들의 영업이익은 총 19조4772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1.2% 줄었다. 2분기에는 더욱 나빠질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줄줄이 자금 조달을 준비 중인 A급 이하 기업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국도화학 보령제약 포스코기술투자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케피코 GS E&R 등이 다음달 회사채 발행을 앞두고 있다. 팔리지 않는 채권 물량이 쌓여갈수록 앞으로 나올 회사채는 유통시장에서도 소화하기가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증권사들이 투자수요를 모으기 힘든 회사채 인수를 주저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인수 물량을 일시적으로 담아두는 ‘회사채 장부’가 가득 차면 증권사들은 헐값에라도 보유 물량을 처분해야 한다. 이런 인수 장부는 대형 증권사 기준으로 각각 수천억원 규모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증권사 회사채 인수담당 임원은 “내놓기만 하면 팔리던 회사채 발행시장의 호황기가 끝나는 시기를 맞이한 것 같다”고 말했다.

증권사들은 2012년 4월 회사채 수요예측 제도 시행 직후 수개월간 팔리지 않은 채권물량이 급증해 큰 위기를 겪은 적이 있다. 그해 5~7월 발행된 공모 회사채의 평균 청약 경쟁률은 0.6 대 1 수준에 불과했다. 회사채 인수 업무가 마비될까 봐 걱정했던 증권사들은 그해 하반기부터 나타난 가파른 채권금리 하락(채권가격 급등) 덕분에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김진성/이태호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