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분위기라면 신용등급 강등에도 이혼 결정처럼 숙려 기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한 베테랑 채권매니저의 말이다. 그는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예전처럼 정량적 기준만으로 신용등급을 낮췄다가는 엄청난 후폭풍이 불지 않겠느냐”며 “신용평가사도 급격한 등급 조정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이스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등 3대 신용평가 회사가 이달부터 상반기 정기 평가에 들어갔다. 400개 안팎 기업의 작년과 올해 1분기 실적을 비교하면서 신용등급을 재점검하는 작업이다. 코로나19 여파로 기업의 각종 부도 위험 지표가 오른 것을 감안하면 대규모 조정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신평사들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대상 기업 절반 이상의 등급을 무더기로 끌어내려 국내외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안긴 적이 있다.

하지만 회사채 시장 참여자 사이에선 신평사들이 외환위기 직후처럼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1998년 대규모 등급 강등 이후 국내 신평사들은 외부 충격에 따른 등급 조정 작업에 신중한 모습을 보여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듬해 나이스신용평가는 등급 강등(30개)과 등급 상향(31개) 기업 수가 거의 같았다. 일시 충격이 왔다고 해서 곧바로 등급을 낮추지 않았다. 오히려 3대 신평사는 위기가 진정된 후인 2014~2015년이 돼서야 상당수 기업의 등급을 하향 조정했다.

지난달 30일 대한항공이 발행한 자산유동화증권(ABS) 등급에서 신평사들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나이스신용평가와 한국기업평가는 지난해와 똑같이 ‘A’를 줬다. 한 증권사 기업금융 담당자는 “올 들어 매출이 절반 이하로 급감한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너그러운 평가”라고 말했다. 당국의 ‘무언의 압박’도 부담이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신평사들로부터 ‘신용등급 강등 조건(트리거)’ 자료를 걷어갔다. 강등 조건은 ‘부채비율 500% 초과’처럼 일정 기준에 들어오면 등급을 자동으로 낮추는 장치다. 시장 참여자들은 당국이 신평사들에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보고 있다.

신평사들은 시장 안정을 크게 위협하지 않으면서 등급 체계의 신뢰도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접점’을 찾으려 고민할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증권사의 신용분석 애널리스트는 “신평사들이 현재의 상황이 이례적이라는 데 초점을 맞춰 강등 조건을 제한적으로 적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