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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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키움증권 사장은 과묵한 편이다. 대화를 주도하기보다는 조용히 듣다가 한마디 내놓는 스타일이다. 친화력과 언변으로 인간관계를 넓히는 ‘영업통’이 승승장구하는 증권가에서는 이례적인 부류에 속한다.

이 사장의 단골 식당도 그를 닮았다. 남도 요리 전문점 간판을 내건 수라한정식. 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한 서울 여의도에선 드문 소박한 한식당이다. “10년 넘게 다니다 보니 정이 든 곳인데 맛 하나는 제가 보장합니다.” 이 사장은 두툼한 대방어회부터 권했다. 초고추장이나 고추냉이 없이 완도산 곱창김에 회를 싸 간장에 살짝 찍은 뒤 입에 넣었다. 입안 가득 차오르는 담백함이 일품이었다. 그는 소주잔을 건네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결혼 후 은행원으로 사회에 첫발

이 사장은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대학 진학 전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학창 시절엔 어머니의 교육관이 큰 영향을 미쳤다.

“요즘 기준으로 봐도 어머니는 무척 자유로운 분이셨어요. 삼남매를 키우면서도 자식들에게 싫은 소리 한번 안 하셨죠. ‘공부해라’ ‘나중에 뭐가 돼라’ 이런 부담도 전혀 안 주셨어요. 시간이 필요한 일에도 언제나 믿고 기다리며 존중해주셨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이 사장 역시 직원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며 신뢰를 보내는 ‘덕장’으로 정평이 나 있다.

광주 숭일고를 졸업한 이 사장은 1975년 서강대 철학과에 진학한다. 철학과 출신 최고경영자(CEO)는 증권가는 물론 재계 전체에서도 드문 경우다. “당시만 해도 인문학 전공자 사이에서 금융권은 선호도가 높은 분야가 아니었어요. 취직 걱정이 없었던 때니까요. 저도 대학 시절에는 막연히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었습니다.”

회 접시를 비워가자 꼬막과 낙지무침이 나왔다. 두 요리 모두 간이 얌전하게 배 밥보다는 이야기와 곁들여 먹기 안성맞춤이었다. 대학 시절 진로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던 이 사장은 졸업한 이듬해 조흥은행에 입행한다. 결혼이 계기였다. 스무 살 때부터 만남을 이어온 첫사랑과의 결혼을 결정하고 은행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도 은행은 월급이 많고 안정적인 직장으로 꼽혔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이현 사장 "은행·증권사 거쳐 키움 창립멤버로…모두가 말렸지만 항상 도전했죠"
남들이 말리는 곳에 기회가 있다

안정성을 생각하며 입행한 조흥은행에서 그는 30년 넘게 이어질 역동적인 커리어의 계단을 오른다. 코딩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은행권은 민간 영역에서는 사실상 처음으로 컴퓨터를 도입하고 있었다. 조흥은행도 희망하는 직원들에게 전산교육을 했지만 대졸 사원들은 3개월 동안 업무에서 빼준다는 ‘당근’에도 지원자가 없었다.

“당시 대졸 사원들은 전산을 단순한 기술 정도로 인식했어요. 저도 호기심에 지원한 것에 가까웠습니다. 막상 컴퓨터의 원리를 배우고 포트란, 코볼, 베이직 같은 언어 하나하나를 배워 보니 정말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1987년 그는 동원증권 산하 동원경제연구소로 이직했다. 이 사장의 은행 동료들은 모두 만류했다. “당시만 해도 은행에서 증권사로 이직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수익 규모나 안정성은 물론이고, 지금과 같은 인센티브 체계도 없어서 보수 측면에서 은행이 훨씬 나은 직장이었죠. 그런데 저는 오히려 남들이 말리는 곳에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은행에서는 할 수 없는, 회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저 역시 성장하는 경험을 증권사에서는 겪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죠.”

증권업계에서도 이 사장의 정보기술(IT) 분야에 대한 도전은 이어졌다. 1998년 그는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에서 온라인사업 태스크포스(TF)팀을 이끌었다. 당시 인터넷 보급률이 폭증하면서 동원증권은 별도 온라인 증권사 설립을 검토했다. 온라인 증권사를 위한 기술적인 기반은 이미 충분했다. 문제는 규제였다. “증권계좌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실명 확인이 필요한데, 증권사 지점에서 계좌를 개설하는 기존 증권사와 달리 지점이 없는 온라인 증권사는 실명 확인을 해줄 방법이 없었죠.”

이 사장은 과거 기업들의 사례를 무수히 뒤져 은행 등 다른 금융회사를 통해 실명 확인이 가능하다는 허가를 정부로부터 받았다. 그의 노력에도 동원증권은 온라인 증권사업에 신중론을 꺼냈다. 오프라인 지점 중심의 수익모델과 충돌한다는 사내 목소리가 이유였다. 이에 이 사장은 다시 한번 모두가 말리는 선택을 했다. 1999년 증권업계 순이익 4위인 동원증권을 퇴사해 국내 최초 온라인 증권사 키움증권(당시 키움닷컴증권)의 창립 멤버로 합류한 것이다.

“이번엔 진짜 망할 수도 있다는 소리까지 들었어요.” 이 사장은 웃으며 당시를 회상했다. 주변 만류에도 그는 온라인 증권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평균 증권거래수수료가 0.45% 정도였습니다. 주식을 한번 사고팔면 1%에 가까운 수수료를 증권사에 냈지요. 증권거래수수료는 기본적으로 투자상담과 위탁매매 두 가지 서비스에 대해 지급하는 비용이에요. 온라인 증권사는 대면 상담이 없으니 위탁매매 수수료만 받는다면 투자자들의 수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거래수수료를 낮추고, 오프라인 지점 없이 온라인으로만 영업하는 키움의 전략은 대성공을 거뒀다. 키움은 2005년 이후 15년 연속 주식 위탁매매 시장점유율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빠른 물고기가 큰 물고기 잡아먹는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병어조림이 나왔다. 탱글탱글할 정도로 살이 오른 병어가 마늘과 무 향을 짙게 걸쳐입었다. 적잖게 배가 불렀는데도 계속 손이 갔다. 요리를 칭찬하던 이 사장은 경영철학을 묻는 질문에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전승불복 응형무궁(戰勝不復 應形無窮)’, 전투에서 승리는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손자병법》 ‘허실편(虛實篇)’에 나오는 구절로 ‘변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렵다’는 뜻이죠. 아날로그 시대의 증권업계는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고 사는 곳이었습니다. 증권사들의 자본금 순위가 곧 순이익 순위를 결정할 만큼 규모의 차이가 실력의 차이로 이어졌죠. 하지만 지금은 빠른 물고기가 큰 물고기를 잡아먹는 시대입니다. 증권업계도 마찬가지예요. 더 새로운 서비스, 더 새로운 상품, 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증권사가 성과를 독점할 겁니다.”

이 사장은 취임 이후 꾸준히 신사업 진출과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키움증권의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추구해왔다. 리테일 시장에서 1등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주식 시황에 따라 실적이 좌우되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키움은 지난해 대한항공 두산 등의 5조원 규모 채권 발행을 대표로 주관하며 채권발행시장 순위를 6위로 끌어올렸다. 증권업계에서는 지난해 키움증권이 투자은행(IB) 부문 성장에 힘입어 창사 이후 최고 실적인 별도재무제표 기준 3000억원대 순이익을 거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좌절도 있었다. 지난해에는 심혈을 기울인 인터넷전문은행 예비인가에서 탈락했고, 자산운용사 확대에도 고배를 마셨다. “아쉬움은 남지만 자본시장은 매 순간 변하는 곳입니다. 다음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세 시간 넘도록 술잔이 오가며 이어진 대화에도 이 사장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지막 메뉴로 완도산 매생이를 걸쭉하게 끓인 매생이굴떡국이 나왔다. 쫀득한 떡과 통통하게 익은 굴이 국물과 어우러져 속을 가라앉혔다.

키움증권은 올해 창사 20주년을 맞았다. 사람으로 치면 약관, 성인이 되는 나이다. 이 사장이 꿈꾸는 키움증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플랫폼 기업’이라는 표현이 나오기 전부터 키움증권은 이미 주식시장을 장악한 플랫폼이 됐습니다. 올해는 투자자들의 관심이 늘고 있는 해외채권 서비스를 확대하고, 동남아시아 시장 공략을 위해 베트남 진출 등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 주식을 넘어 온라인 자산관리(WM) 플랫폼으로 거듭나 자산가들의 전유물로 취급받는 WM을 대중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여 투자은행과 자산관리의 최고 회사로 키우는 게 목표입니다.”

■ 키움증권은…

2000년 1월 설립된 국내 첫 온라인 증권회사로 다우기술이 대주주다. 본사를 제외한 모든 지점을 없애고 낮은 거래수수료로 온라인 위탁매매 서비스를 제공해 개인투자자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키움증권의 작년 3분기 기준 국내 주식시장 점유율(개인 거래 기준)은 30.3%로 1위다. 작년 3분기 누적으로 키움증권을 통해 거래된 국내 주식만 118조원어치에 달했다. 리테일 브로커리지(위탁매매) 시장의 절대 강자로 통한다.

금융투자업계에서 키움증권은 리테일 브로커리지의 실적 비중이 높은 탓에 주식시장 시황에 따라 실적 변동성이 크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현 사장이 취임한 뒤 채권 발행과 기업공개(IPO) 등 투자은행(IB) 부문을 강화, 수익 다각화를 시도해 성과를 내고 있다.

■ 이현 키움증권 사장 약력

△1957년 광주광역시 출생
△1975년 광주 숭일고 졸업
△1982년 서강대 철학과 졸업
△1988년 고려대 경영학 석사
△1996년 국민대 경영학 박사
△1983년 조흥은행 입행
△1989년 동원증권 입사
△2000년 키움닷컴증권 이사
△2002년 키움닷컴증권 상무
△2007년 키움증권 전무
△2009년 키움증권 부사장
△2013년 키움저축은행 대표(부사장)
△2016년 키움투자자산운용 대표이사 사장
△2018년 키움증권 대표이사 사장
[한경과 맛있는 만남] 이현 사장 "은행·증권사 거쳐 키움 창립멤버로…모두가 말렸지만 항상 도전했죠"
이현 사장의 단골집 수라한정식

당일 들어온 해산물 엄선…방어회·꼬막비빔밥 일품

[한경과 맛있는 만남] 이현 사장 "은행·증권사 거쳐 키움 창립멤버로…모두가 말렸지만 항상 도전했죠"
전남 고흥군에서 나고 자란 박병숙 사장이 서울 여의도에서 20년째 운영하고 있는 수라한정식. 손님들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사장님이 알아서 주라”며 자리에 앉는다. 박 사장은 “오늘은 꼬막비빔밥이 맛있다”고 추천한다.

당일 들어온 신선한 재료로 음식을 조리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다른 음식을 선보인다. 요즘은 꼬막비빔밥, 방어회, 낙지초무침이 인기다. 봄에는 주꾸미, 여름에는 병어와 민어, 가을에는 갑오징어가 상에 오른다. 박 사장은 “재료 상태는 손님들이 바로 알아본다”며 “매일 새벽 5시에 수산시장에서 그날 가장 신선한 식재료를 골라온다”고 했다. 고향인 고흥군 동강면과 근처 벌교읍에서 재료를 가져오기도 한다.

점심은 물론 저녁에도 남도 음식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대표 점심 메뉴인 돌솥비빔밥과 꼬막비빔밥은 든든한 한 끼로 만족도가 높다. 저녁에는 동강막걸리와 함께 병어조림(시가)을 찾는 이가 많다.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오후 3~5시는 재료 준비 시간)까지 영업하며 명절은 휴무다.

전범진/한경제 기자 forwar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