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는 지난 7월 ‘국민연금 위탁운용사 의결권 행사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내년부터 국내 운용 주식 중 절반가량인 외부 위탁 주식의 의결권을 위탁운용사에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국민연금의 독점적 의결권 지배력과 연금사회주의 논란을 의식한 조치였다.

하지만 ‘무늬만 의결권 위임’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의결권 위임 대상 상장기업 지분 가치가 전체의 6.5%인 7조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복지부가 ‘국민연금의 직접 보유 지분이 없는 회사’만 의결권을 위임하고 국민연금과 위탁운용사가 동시에 투자한 기업은 위임 대상에서 제외하는 ‘꼼수’를 쓴 결과다.
국민연금, 삼성·현대車 등 대형주엔 '입김' 여전
‘꼼수’로 의결권 위임 대상 줄여

국민연금은 작년 말 기준 638조7800억원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 이 중 주식은 221조8700억원(비중 34.7%)으로 채권(337조5800억원, 52.8%)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보유 주식은 국내와 해외로 나뉜다. 국내 주식 가치는 상장 주식 107조5000억원을 포함해 모두 108조9000억원어치다. 이 중 국민연금 직접 투자분이 58조8000억원이다. 나머지 50조1000억원은 자산운용사가 국민연금 돈을 받아 투자했다. 직접 투자와 위탁 투자 비중은 약 55 대 45다.

위탁운용사가 투자한 주식은 모두 해당 운용사가 자체 판단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한다면 국민연금과 위탁운용사가 각각 의결권을 행사하는 지분 가치는 이 비중과 비슷해야 한다.

하지만 복지부는 ‘국민연금의 직접 보유 지분이 없는 회사’만 의결권을 위임하고 국민연금과 위탁운용사가 동시에 투자한 기업은 위임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중소형주에만 위임 집중

위탁운용사가 투자했더라도 국민연금이 직접 투자하는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신세계 현대중공업 대한항공 CJ 등 국내 대표 일반 기업과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등 대형 금융회사는 의결권 위임 대상에서 모두 제외된다. 중소형주펀드, 코스닥펀드, 배당주펀드 등 특수 유형의 펀드가 투자한 시가총액 1000억~2000억원대, 심지어 수백억원의 소형주만 집중적으로 의결권 위임 대상에 속하게 된다.

이런 사실은 작년 말 위탁운용사만 투자한 지분율 상위 종목을 살펴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지분율 상위 10위 기업 중 지투알, 아세아, HDC아이콘트롤스, 메가스터디 등 8개는 시가총액이 1000억~2000억원이다. 심지어 대창단조는 시총 500억원대 소형주다.

국민연금과 위탁운용사가 공동 투자한 지분율 상위 10위 종목 중에는 대형 기업이 대부분 포함돼 있다. 대림산업, 신세계 등은 시총 2조원이 넘는다. 만도, SKC 등은 시총 1조원 이상이다. 시총이 가장 적은 한라홀딩스, SBS 등도 3000억원을 넘고 있다.

“위탁운용 종목은 의결권 모두 넘겨야”

정부는 국민연금과 위탁운용사가 모두 투자한 기업을 의결권 위임 대상에서 제외한 이유를 “단일 종목에 대해 단일한 의결권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주요 대기업은 쏙 뺀 채 중소형 기업만을 대상으로 의결권을 위임하는 건 ‘생색내기용’에 불과한 조치”라고 지적한다. 위탁 운용 주식은 의결권도 모두 위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준행 서울여대 교수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위임 제도는 국민연금의 독점적 지배력을 해소하고 의사결정 리스크를 분산하자는 취지”라며 “대기업은 빼고 중소형 주식 의결권만 위임하는 것은 이런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상열/황정환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