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본시장을 뒤흔든 사건 (15) 1997년 IMF 구제금융 신청

21세기 현대판 경술국치
1997년 12월3일 오후 7시40분, IMF 구제금융 합의문에 서명
콜금리 年 25% 등 이면각서 참담

美·日에 긴급 지원 요청했지만…채권발행 등 전방위 자력회생 모색
"IMF 틀 안에서 지원" 답변만

김대중 대통령 후보 "재협상" 발언…글로벌 신평사들, 일제히 신용강등
12월23일 금융시장 그야말로 '패닉'

결국 '경제는 신뢰' 깨달아
"IMF와 약속 1%도 어김없이 이행"…보도 뒤에 100억弗 조기지원 받아
살인적인 고금리·가혹한 구조조정…외환위기 끝났지만 새 '폭풍' 닥쳐
1997년 12월 3일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과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서 만나 자금지원 조건 협상을 마친 뒤 이동하고 있다.  /한경DB

1997년 12월 3일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과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서 만나 자금지원 조건 협상을 마친 뒤 이동하고 있다. /한경DB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협의를 추진하겠습니다.”

원·달러 환율이 사상 처음으로 달러당 1000원을 돌파하기 사흘 전인 1997년 11월 14일.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청와대를 찾아 ‘국가 부도’ 선언과 다름없는 구제금융 신청 계획을 보고했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의 비극적 결말에 최종 승인을 해달라는 자리였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은 ‘뜻밖에 걱정하는 기색 없이’ 협의를 재가했다. 잠시 어리둥절했던 강 부총리는 이틀 뒤 IMF와 극비 회동을 하고 구제금융 신청에 합의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을 발칵 뒤집어놓을 아시아 세 번째 ‘국가 부도’는 11월 19일 한국 정부가 기자회견장에서 발표하기로 약속했다.

환율이 1036원으로 사흘 연속 가격제한폭까지 급등했던 ‘D-데이’ 오전 11시. 청와대는 난데없이 임창열 통상산업부 장관을 새 경제부총리로 임명하는 개각을 단행했다. 임명 6시간 만에 기자회견장에 나온 임 부총리는 기존 합의를 뒤엎는 돌출 발언을 내놨다. “IMF 도움 없이도 국난을 해결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정권의 파국을 모면하고자 벌인 일종의 '정치적 도박'이었다는 의혹을 남긴 국제합의의 일방적 파기. 이 사건은 미국과 IMF가 한국 정부의 개혁 의지에 강한 불신을 갖는 계기로 발전한다. 구제금융 협상은 이 때부터 한국 경제를 더욱 고통스러운 개혁의 소용돌이로 내모는 강압적인 요구로 돌변했다.

합의와 파기

“가용 외환보유액은 얼마나 남았나. 필요한 자금으로 대략 얼마를 생각하나.” (미셸 캉드쉬 IMF 총재)

“170억달러 정도다. 다 쓸 생각은 아니지만 넉넉잡아 300억달러가 필요하다.”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

IMF 협의 계획의 청와대 보고 이틀 뒤인 1997년 11월 16일 일요일 저녁. 강 부총리와 이경식 총재 등은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미셸 캉드쉬 IMF 총재와 처음 마주했다. 양측은 이 자리에서 구제금융 신청과 지원에 합의했다. 공표 시점은 한국 요구에 따라 사흘 뒤 ‘금융시장 안정 및 금융산업 구조조정 종합대책’ 발표 기자회견 날짜로 맞췄다. 보도자료 배포 때 합의 사실이 새나가지 않도록 공표는 질의응답 시간을 활용하기로 했다.

정부와 IMF가 협조융자 지원 조건에 합의했다는 내용의 1997년 12월 4일자 한국경제신문.  /한경DB

정부와 IMF가 협조융자 지원 조건에 합의했다는 내용의 1997년 12월 4일자 한국경제신문. /한경DB

IMF 실무 협상단이 국내에서 벌어질 일을 모른 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11월 19일. 아침 일찍 청와대에서 종합대책 기자회견 내용을 보고하던 강 부총리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소파에 앉아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김 대통령은 뜬금없이 “분위기 쇄신이 필요한데…”라고 중얼거렸다. 집무실을 나온 그는 비서실장으로부터 경질을 통보받았다.

당일 오후 5시 기자회견 마이크는 오전 11시 임명장을 받은 임창열 신임 부총리가 잡았다. 그는 기자의 구제금융 신청 질문에 “IMF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국제금융계에서 협력만 해준다면 위기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고 답했다. IMF와의 사전 합의 사실을 알고 있던 재정경제원 고위관료들은 깜짝 놀라 입이 벌어졌다. 훗날 검찰 조사에서 임 부총리는 IMF와의 합의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합의 사실을 전달했다고 밝힌 김 대통령과 진술이 엇갈렸다.

이틀간의 몸부림

새 선장을 맞은 한국 경제호(號)는 일본에 긴급 자금지원 요청 ‘밀사’를 급파하는 등 전방위로 자력 회생 방안을 모색했다. 외국은행 국내 지점엔 보유 달러를 정해진 조건으로 원화와 맞교환하는 통화 스와프를 제안했다. 국책은행과 정부가 채권을 발행해 달러를 조달하는 방안도 타진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IMF의 틀 안에서 지원하겠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재정경제원은 그제서야 국제금융시장을 지배하는 미국이 이미 일본과 ‘한국의 IMF행’을 합의한 상황임을 직감했다.

환율이 장중 1200원을 돌파한 11월 21일 금요일 오후 3시30분. 초조해진 임 부총리는 재경원 기자실에 들러 “2~3일 내 최종 결론을 내리겠다”며 태도 변화를 암시했다. 하지만 이후 어찌 된 영문인지 그날 밤 10시15분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IMF에 200억달러의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국민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남긴 최초의 구제금융 신청 공표였다. 11월 24일 월요일 코스피지수는 34.79포인트(7.17%) 떨어진 450.64로 주저앉으며 10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IMF와 실무협상을 벌이는 와중에도 정부는 자력 회생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임 부총리는 11월 28일 일본을 방문해 브리지론(임시융통 자금)을 요청했다. 이런 시도는 그날 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김 대통령에게 전화해 ‘(다른 시도를 멈추고) IMF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경고한 뒤에야 막을 내렸다.
1997년 12월 대한상공회의소와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한국경제신문사 공동 주관으로 시작한 경제살리기 1000만 명 서명운동은 4개월여 만에 1003만 명을 돌파했다.  /한경DB

1997년 12월 대한상공회의소와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 한국경제신문사 공동 주관으로 시작한 경제살리기 1000만 명 서명운동은 4개월여 만에 1003만 명을 돌파했다. /한경DB

저항의 대가

원·달러 환율이 장중 1300원 수준까지 치솟은 1997년 12월 3일 오후 7시40분. 한국 정부는 마침내 경제주권 포기를 뜻하는 합의문에 서명했다. 재정 긴축과 금융회사 구조조정, 금융시장 추가 개방, 대기업의 상호지급보증 해소를 적극적으로 이행한다는 조건이었다.

IMF는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등 유력 대선 후보들에게도 ‘자금지원 협정 준수 이행 각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이튿날 신문들은 거의 모든 지면을 할애해 ‘경술년 국권 피탈 이후의 최악의 국치일’로 규정하고 비통한 심정을 전했다.

자금지원에 앞서 우선 이행해야 하는 조치를 담은 ‘이면각서’는 더욱 가혹했다. △콜금리 연 25%로 인상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의 퇴출 △9개 부실 종합금융사의 영업정지 △외국인의 적대적 기업인수 허용 법안 제출 △외국 금융회사의 국내 금융회사 인수 허용 계획 발표 등 충격적인 내용이 담겼다. 구체적인 숫자와 기업 명단, 일정까지 적시했다. 한국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을 반영한 이 이면각서는 12월 3일 합의 발표 후 며칠이 지나서야 대중에게 알려졌다.

끝나지 않은 위기

“내일모레 당장 파산할지도 모른다. 아침저녁으로 걱정하고 있다.” (12월 23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

IMF와의 자금지원 합의 이후에도 한국의 파산(모라토리엄)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해외 금융회사들은 계속해서 만기연장을 거부하고 한국에서 돈을 빼갔다. 임 부총리는 미국과 IMF에 긴급 자금지원을 요청했지만 “필요한 개혁을 이행해야 돈을 빌려주겠다”는 답변만 받았다.

미 언론에선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의 ‘가혹한 이행조건 요구’를 ‘엄한 애정(tough love)’으로 묘사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12월 10일 “IMF와 재협상하겠다”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발언을 인용하며 “국제금융시장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고 살벌한 분위기를 전했다. 행동 없이 급전만 요구하는 한국을 ‘망하게 둬야 한다’는 외신 보도도 있었다. 국제금융시장의 험악한 분위기에 놀란 신용평가사들도 행동에 나섰다. 무디스는 12월 21일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 등급(Ba1)으로 두 단계 떨어뜨렸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12월 23일 한국 금융시장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환율은 1965원으로 치솟았고, 종합주가지수는 사상 최대폭인 7.5% 하락한 366.36으로 마감했다. 기업어음(CP) 금리는 연 38%로 8%포인트 폭등했다. 가용 외환보유액은 87억달러에 불과했다. 모든 지표가 한국의 모라토리엄을 예고하고 있었다. 12월 18일 당선을 확정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은 23일 “약속을 1%도 어김없이 이행하고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 계기로 삼겠다”며 신뢰를 호소했다.

크리스마스의 백기투항

“미국과 일본, IMF 등이 한국에 100억달러를 조기 지원하기로 했다.” (루빈 장관)

1997년 크리스마스 이브. 루빈 장관은 전격적인 조기 자금지원 발표로 마침내 한국을 향한 ‘엄한 애정’을 거둬들였다. 한국 정부가 주요 개혁조치의 조기 이행을 확약하는 의향서를 제출한 직후였다. 미 언론은 루빈이 한국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휴가 도중 돌아와 조기 지원 계획을 발표한 루빈은 “한국 문제로 장시간 통화하느라 낚시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고 투덜거렸다. 미국의 불신을 산 약소국의 대가는 혹독했다. 정부는 부실 금융회사 정리 일정을 대폭 앞당겼고 채권시장도 완전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선물’과 한국의 ‘약속’은 한국 외환위기의 끝과 모든 경제 분야에 닥칠 새로운 위기의 시작을 의미했다. 살인적인 고금리와 인적 구조조정으로 한국의 실업자는 1997년 말 50만 명(실업률 2.1%)에서 1999년 2월 180만 명(8.8%)을 돌파했다. 1998년 경제성장률은 건국 이래 최악인 -5.5%로 곤두박질쳤다. 1999년까지 3년 동안 상장폐지 기업은 218곳에 달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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