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상장기업이 올해 2분기 이후 설비투자를 대폭 줄이고 현금자산 보유를 늘리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분쟁 등으로 대외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데다 국내 경기가 빠르게 하강 국면으로 진입하자 선제 대응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설비투자는 줄이고 현금자산은 늘리고… 불황 대비하는 기업들
1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768곳의 반기보고서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2분기 설비투자 총액은 43조3201억원으로, 작년 2분기(60조362억원)보다 16조7161억원(27.8%)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2분기 기준으로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설비투자가 전년 동기보다 줄어든 것은 2015년 이후 처음이다.

반면 이들 상장사가 보유한 현금 및 현금성 자산 총액은 204조5869억원으로, 전년 동기(193조9239억원) 대비 10조6630억원(5.5%) 늘었다. 업계와 증시 전문가들은 지난해 삼성전자 등 주요 반도체기업이 공격적으로 시설투자를 한 데 따른 기저효과도 있지만, 올 들어 대내외 환경이 급속히 악화하자 기업들이 비용 지출을 줄이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보유 현금을 늘리기 시작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설비투자는 줄이고 현금자산은 늘리고… 불황 대비하는 기업들
박상현 리딩투자증권 연구원은 “현금을 쌓아놓고도 기업들이 투자를 주저하는 것은 국내 경기 우려와 함께 무역분쟁 등으로 교역조건 관련 리스크가 커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상품 1단위를 수출한 대금으로 수입할 수 있는 상품의 양을 뜻하는 순상품교역지수는 지난 8월 93.96으로, 전년 동월 대비 9.1% 하락했다. 순상품교역지수가 하락한 것은 수출단가가 떨어지거나 수입단가가 오르는 등 교역조건이 나빠졌음을 뜻한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이날 발표한 9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도 84.2로 39개월 만에 가장 낮았다. A기업 관계자는 “반도체와 석유화학 등 몇몇 업종을 제외하면 신규 투자 여력이 없는 곳이 많다”며 “지배구조 개편 등에 신경 쓰느라 투자와 연구개발(R&D)을 제대로 못 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올 2분기 설비투자가 줄어든 데는 ‘반도체 기저효과’도 영향을 미쳤다. 주요 반도체 기업이 작년에 공격적으로 시설투자를 크게 늘렸는데 올해 투자규모는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삼성전자의 2분기 설비투자액은 8조8575억원으로 전년 동기(14조644억원) 대비 5조2069억원(-37.0%) 감소했다. 증권업계에선 반도체 라인 시설투자가 일단락되면서 설비투자액이 대폭 줄어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의 설비투자는 2016년 4분기 12조8882억원으로 처음 10조원을 돌파한 뒤 지난해 3분기까지 네 분기 연속 분기마다 10조원을 넘겼다.

하지만 반도체업종이 아닌 상장사들도 설비투자를 줄이고 보유 현금성 자산을 늘린 기업이 적지 않다는 것은 기업들이 앞으로의 경영환경을 어둡게 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대자동차는 2분기 설비투자를 전년 대비 1123억원 줄이면서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1조5308억원 늘렸다. LG도 설비투자를 1894억원 줄이는 대신 보유 현금성 자산을 3394억원 더 확보했다.

박상현 리딩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경기 사이클이 사실상 올해 1분기를 정점으로 하락세로 접어들었다는 점이 기업 설비투자 감소와 보유현금 확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한다”며 “미국과 중국 간 무역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2분기”라고 설명했다.

상장사들의 이 같은 움직임은 통계청이 매월 내놓는 설비투자 관련 지표에서도 나타난다. 통계청이 지난 8월 내놓은 ‘7월 산업활동동향’을 보면 7월 설비투자는 전월 대비 0.6% 감소해 3월 이후 5개월 연속 하락세를 이어갔다. 5개월 연속 설비투자가 줄어든 것은 외환위기를 겪었던 1997년 9월~1998년 6월(10개월) 이후 21년 만이다.

기업 설비투자의 급속한 위축은 양질의 일자리 창출 등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소득주도성장에 차질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소득주도 성장이 정부의 생각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기업의 투자 위축이 고용 부진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직면했기 때문”이라며 “정부는 기업의 비용구조를 악화시킬 수 있는 정책은 최대한 지양하고 투자 관련 규제 합리화 등을 적극 추진해 기업의 투자심리를 북돋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