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 전경(사진=오정민 한경닷컴 기자)

미국 뉴욕 맨해튼 전경(사진=오정민 한경닷컴 기자)

"이머징(신흥국) 시장에 대한 미국 월가 '큰손'들의 투자심리가 냉각되고 있습니다. 올 초와 비교하면 자사를 통해 한국 주식을 거래하는 외국인 기관투자자들의 주문건수와 규모가 뚜렷하게 줄었고, '신흥국 증시의 투자매력이 떨어졌다'는 의견도 다수 나오고 있습니다."

17일(현지시간) 한경닷컴이 국제금융의 중심지 뉴욕에 진출한 한국 금융투자업계 현지법인들을 찾은 가운데 한 대형증권사 미국법인장이 익명을 요구하며 토로한 말이다.

현지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미중 무역분쟁 등 보호무역주의의 확대, 달러화 강세, 미국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자본 유출 우려 등으로 신흥국 시장에 대한 부정적인 전망이 퍼져나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 인상이 확실시되고 있는 만큼, 신흥국 시장이 글로벌 유동성 축소에 따른 자본 유출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분석이다.

아르헨티나, 터키와 같은 경상수지 취약국의 불확실성이 불거진 만큼 당분간 신흥국의 주식과 채권 시장에서 투자심리 경색 여파가 불가피하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최근 터키 리라, 아르헨티나 페소화 등 신흥국 통화가 급락세를 나타냈다. Fed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신흥국에서 자금 이탈이 빨라지고 외화 부채가 많은 일부 신흥국의 상환부담이 늘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한국은 신흥국 중 대외건전성이 양호한 축에 속하지만 다른 신흥국들과 탈동조화할 방도는 보이지 않는다는 게 현지에서 만난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류재홍 미래에셋대우(8,840 -1.34%) 뉴욕법인장은 "지난해 초 외국인 투자자들은 반도체 경기 호황 지속과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감으로 적극적으로 한국 주식을 매수했지만 올해는 상승 업종이 뚜렷하지 않아 종목 선정에 대해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미중 통상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 수출 비중이 높은 한국의 증시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태화 삼성자산운용 뉴욕법인장은 "과거 미국 금리 인상기마다 미국 증시 및 채권 시장이 호조를 나타내고 신흥국 관련 펀드에서는 자금이 빠져나가는 경향을 보여왔다"며 "무역전쟁 문제 등이 가중되면서 이번 사이클에서는 신흥국 시장의 아웃플로우(자금유출)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NH투자증권(9,320 +1.75%) 뉴욕법인에서 외국인 기관투자자에게 한국주식 기관영업(세일즈)을 담당하는 한 직원은 "많은 투자자들이 한국기업들의 성장동력 저하에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고, 이는 거시경제(매크로) 등 구조적인 문제인 만큼 단기간에 변하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달 18~20일 평양에서 열리는 3차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남북한 정부 간 관계 개선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 증시에 대한 외국인들의 투자 의견 개선은 제한적이었다고 풀이했다. 북한 리스크가 다소 완화됐으나 "아직 불확실성이 크고 관련 불협화음이 이어지는 만큼 갈길이 멀었다"는 의견이 많다는 평가다.

반면 미국은 경제지표 호조와 함께 금리 인상기를 맞아 투자 수요가 한층 늘어나고 있는 분위기다.

최근 발표된 미국의 경제지표는 양호한 성적을 거둬 투자심리를 한층 달구고 있다. 미국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직전 분기 대비 4.2%(연율 기준)를 기록해 2014년 3분기(4.9%) 이후 약 4년 만에 최고치로 뛰었다. 8월 고용지표에 따르면 실업률은 두 달 연속 3.9%를 기록해 18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미국 정부가 세금 감면과 규제 완화를 통한 리쇼어링(reshoring·국외 진출 공장의 본국 회귀) 정책에 방점을 둔 만큼 2~3년간 미국 경제 성장세는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다. 금리 인상 전망과 함께 10년 만기 미 국채수익률도 다시 3%대로 올라선 상태다.

허준혁 미래에셋자산운용 미국법인 글로벌채권운용본부장은 "최근 글로벌 교역 관계에서 보호무역주의가 대두되면서 채권 등 현지 자산투자 움직임은 '미국 대 비(非)미국' 구도로 나뉘고 있다"며 "내후년까지 미국 경기가 호황을 보일 것으로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미국 경기 전망과 기준금리가 당분간 상승세를 이어갈 전망인 만큼 단기적으로 투자매력 구도가 바뀌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Fed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2015년 12월 첫 금리인상을 시작으로 그동안 7차례 금리를 인상했다.

김 법인장 역시 "미국 고용지표의 질적 개선이 눈에 띄고, 경제지표상 유럽과 아시아에 비해 확연하게 호조세를 나타내고 있다"며 "미국 경기 정점론이 불거지고 있지만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 수준) 등을 고려하면 미국 증시 등 자산시장은 좀 더 상승세를 나타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한국의 경우 외화보유액과 단기외채 등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감소한 만큼 상대적으로 안정성이 돋보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 법인장은 "Fed가 기준금리 완화 속도를 완만하게 유지할 경우 한국을 비롯한 대외건전성이 양호한 신흥국 시장에서는 관련 우려를 소화시키면서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며 "최근 미국 증시 상승 등을 고려하면 포트폴리오에서 과도하게 위험자산 비중을 높이기 보다는 '중위험·중수익' 전략을 추구하는 전략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한편, KB증권에 따르면 지난 12일 기준 선진국 주식형 펀드 연간 누적 자금 유입 규모는 772억달러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채권형 펀드는 북미 펀드(866억달러 유입)를 중심으로 702억달러를 기록, 연중 최고치 수준에 달했다. 반면 신흥국 주식형 펀드의 연간 누적 유입 규모는 5월 초 고점인 545억달러에서 349억 달러로 떨어졌다. 신흥국 채권형 펀드는 4월 중순에 정점인 149억달러를 기록했으나 줄줄이 빠져나가 현재는 35억달러 순유출 상태로 전환됐다.

뉴욕=오정민 기자 blooming@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