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업계 35년…품질만 신경쓰던 시대는 지났죠"
엘리자베스 아덴, 베네피트, 메리케이, 크리니크, 나스, 키엘, 로레알, 로라 메르시에, 에스티로더.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접해봄직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장품 브랜드들이다. 그런데 이들 화장품을 써봤다면 실제로는 잉글우드랩 제품을 사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화장품 시장은 대부분 생산과 유통이 분리된 구조다. 잉글우드랩과 같은 '얼굴 없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제조업자개발생산(ODM) 업체가 제품을 개발·생산하면 엘리자베스 아덴·에스티로더 등의 브랜드 업체가 유통하는 방식이다. 잉글우드랩은 전세계 150여개 브랜드에 2000여개의 완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이달 인천 남동공단의 공장에서 정성운 잉글우드랩 부회장(잉글우드랩코리아 대표·사진)을 만났다.

◆ 화장품 업계 경력만 35년

잉글우드랩은 2004년 뉴저지 잉글우드에서 설립된 미국 기업이다. 당시 화장품 OEM 업체가 드물었던 미국 시장에서 터전을 잡으면서 현지 화장품 원료 제조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다. 회사를 세운 대표이사 회장은 데이비드 정. 1971년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한국인이다.

한국에 잉글우드랩코리아라는 자회사를 세운 이유도 정 회장이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인데 한국에서 사업을 할 생각은 없느냐는 주변의 권유가 많았다고 해요. 당시 정 회장은 한국 시장 진출을 구체화하진 않았지만 은연중에는 언젠가 고국에서 사업을 해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잉글우드랩이 한국에 진출하게 된 계기를 정 부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2015년에 자회사 잉글우드랩코리아를 서울 강남구에 세운 후 다음해 코스닥시장에 상장했다. 한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자 국내 전문가가 필요했다. 정 회장이 오랜 기간 국내를 떠나있던 탓이다.

정 부회장이 이 회사에 합류하게 된 이유다. 정 부회장은 화장품 업계에서만 35년을 일한 베테랑이다. "LG생활건강이 화장품 시장 진입하던 시점에 입사하면서 20년 넘게 화장품 분야만 담당했죠. 공장장까지 지냈습니다. 이후 중국 화장품 회사에 8년간 근무하면서 상해에 약 8000평 규모의 화장품 공장을 건설하는 과정에도 참여했습니다." 정 부회장의 국내외 현장 경험을 들은 정 회장은 중국까지 그를 찾아가 스카웃했다.

◆ "세계시장 넓다"

정 부회장은 어려운 시기에 합류했다. 잉글우드랩은 지난해 영업손실(연결 재무제표 기준) 98억5900만원을 내며 적자전환했다. 2016년(영업이익 70억2400만원) 정점을 찍었던 실적이 일년 만에 크게 악화된 것이다.

"한국 시장 진출 과정에서 생산공장 확보를 위해 지난해 인수했던 화장품 제조업체 엔에스텍의 부실 자산을 털어내는 과정에서 실적이 부진했습니다. 주가도 떨어졌죠."

하지만 화장품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정 부회장의 눈에는 부진한 실적보다 잉글우드랩의 가능성이 먼저 보였다. 화장품은 이미지가 중요한 사업. 미국 기업이 가진 프리미엄 이미지가 아시아 시장 진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직감해 이직을 결심했다.

"현재 매출은 대부분 미국과 한국 시장에서만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시장은 넓죠. 중국·동남아 등 구매 잠재력이 큰 시장이 많습니다. 미국 시장에서 쌓아온 프리미엄 이미지와 한국 시장 진출로 갖춰진 생산 기지를 바탕으로 아시아 지역의 진출하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 "색조 진출로 턴어라운드 모색"

이 회사가 색조화장품 사업에 뛰어든 것도 아시아 시장 공략과 무관하지 않다. 아시아 지역의 색조화장품 시장 규모는 큰 폭으로 성장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칸타월드패널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에서 소비자들이 색조화장품을 사용하는 비율은 각각 88%와 90%에 달한다. 중국은 아직 40% 수준이지만 성장세는 가파르다. 지난해 기초화장품 시장은 전년 대비 6.7% 성장하는 동안 색조화장품 시장은 20% 이상 커졌다.

잉글우드랩은 지난해 색조화장품 생산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미국에서는 뉴저지주(New Jersey)와 토토와(Totowa)에 위치한 약 3000평 규모의 제2공장을 사들였다. 국내에서는 인천 남동공단에 색조화장품 공장설비를 구축했다. 색조화장품 개발을 위한 연구 및 생산 인력도 대거 늘렸다.

"컨실러, 립스틱, 파우더, 마스카라, 아이섀도우 등 다양한 색조화장품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올해부터 본격적인 발주가 시작될 것으로 보고 있어요."

색조화장품 사업이 본격적으로 괘도에 오르면 실적도 성장세를 되찾을 것이라 확신했다. "색조화장품에 대한 투자 성과가 나타나면 실적은 턴어라운드할 것입니다. 최근 저희 제품이 국내 대기업 화장품 브랜드사의 1차 검사(Audit)를 통과하는 등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매출로 연결될 것을 기대하는 중입니다."
"화장품 업계 35년…품질만 신경쓰던 시대는 지났죠"
◆ "품질 좋은 화장품을 만들던 시대, 한물 갔다"

이날 정 부회장은 잉글우드랩이 개발한 다양한 화장품을 직접 꺼내 보였다. 눈에 띄는 제품은 머메이드 라인의 미스트 제품. 액체 형태의 제품을 흔들면 색깔이 변한다. 이 제품을 시연하던 정 부회장이 말했다.

"화장품 시장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제품 품질은 상향 평준화 됐습니다. 뛰어난 기능만으로 승부를 보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는 '재미있는 화장품'을 구상 중이다. 젤리 형태의 비누를 개발하기도 했다. 소비자가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다. 피부에 닿으면서 색이 변하는 클레이 마스크도 제작했다. 잉글우드랩은 이 제품들을 지난해 말 미국 뉴욕에서 열린 '메이크 업 인 뉴욕'에 출품해 화제를 모았다.

고객 회사의 주문에 따라 생산만 하는 OEM에 그치지 않고 자체 기술로 화장품 '레시피'를 개발해 생산 및 납품하는 ODM에 주력하면서 새로운 제품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정 부회장은 소비자들이 화장을 즐거운 놀이로 인식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품질이 중요하던 시대는 한물 갔죠." 그는 강조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