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3월22일 오후 3시45분

[마켓인사이트] "상장사 1900곳, 정부가 2020년부터 감사인 지정"
중견 건설업체 A사는 최근 외부감사인인 B회계법인과 의견 충돌로 감사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경영 목표에 맞춰 실적을 올려야 하는 회사 측과 엄격한 회계처리를 요구하는 회계법인 간 힘겨루기가 벌어진 것이다. B회계법인 관계자는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 시행이 다가오는데 회사 측 입맛대로 해줬다가는 나중에 부실감사로 무거운 책임을 질 수 있다”고 하소연했다.

오는 11월 ‘회계개혁안(개정된 외부감사법)’ 시행을 앞두고 감사 현장 곳곳에서 잡음이 나오고 있다. 회계사들이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에 대비해 기업에 대한 외부감사를 최대한 보수적으로 하고 있어서다. 2020년 이후 전체 상장사의 87%에 해당하는 1900여 개 기업들이 정부로부터 외부감사인을 강제 지정받을 것으로 예상돼 감사와 관련된 분쟁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상장사 87%가 감사인 지정 대상

2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금융당국이 전체 상장사를 대상으로 시뮬레이션 한 결과 1900여 곳이 주기적 감사인 지정 대상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부감사인을 6년 자유 선임하면 3년 지정받는다’는 ‘6+3’원칙에 따라 2014년부터 감사인을 자유 선임해오고 있는 기업들은 2020년부터는 새로운 외부감사인을 지정받는다.

이 시뮬레이션은 △이미 증선위로부터 감사인을 지정받은 곳 △금융감독원 감리결과 회계처리기준 위반이 발견되지 않은 곳 △기업인수목적회사(SPAC· 스팩) 등은 예외로 적용했다.

지난 21일 기준 2194개인 전체 상장사의 87%에 해당하는 숫자다. 20년째 같은 회계법인을 외부감사인으로 쓰고 있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간판 기업들도 줄줄이 주기적 감사인 지정 대상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 대상인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자산총액 1000억원 이상 비상장사’까지 합치면 3000개 가까운 기업들이 정부로부터 감사인 지정을 받을 것으로 회계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기업들은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에 예외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금융당국은 예외를 최소화하겠다는 방침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예외를 많이 인정하면 부실감사를 막자는 법의 취지가 퇴색된다”며 “제도 시행 초기의 혼란을 막기 위해 2020년부터 분산 지정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금융위는 이달 말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 예외요건 등이 담긴 외부감사법 시행령을 입법예고할 예정이다.
[마켓인사이트] "상장사 1900곳, 정부가 2020년부터 감사인 지정"
◆“감사분쟁 증가 우려”

2020년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 시행을 앞두고 회계법인들은 벌써부터 감사 강도를 높이고 있다. 지정제 시행 이후 새로운 감사인이 과거 감사를 문제 삼을 것을 우려해 까다로운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

부실감사 징계수위가 대폭 강화되는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는 11월 회계개혁안이 시행되면 분식회계와 부실 감사에 대한 과징금 부과 한도가 폐지되고, 현행 5~7년인 징역 기간은 ‘10년 이하’로 늘어난다. 과징금 부과와 손해배상 시효도 현행 각각 5년과 3년에서 최대 8년으로 연장된다.

한 회계법인 관계자는 “예전처럼 기업 사정을 들어주면서 감사를 하다가는 자칫 감옥에 들어가거나 엄청난 벌금을 물게 될 수 있다”며 “예전보다 깐깐하게 감사를 하다 보니 기업들과 분쟁이 늘어나는 상황”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보완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전문가로 구성된 독립적인 협의조정기구를 만들어 분쟁을 사전에 예방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한상 고려대 회계학과 교수는 “원칙 중심의 국제회계기준(IFRS)은 해석의 여지가 많기 때문에 감사 과정은 물론이고 감독당국의 감리와 제재 과정에서도 분쟁이 생길 수 있다”며 “사후적 징계보다는 사전 예방에 주력하는 금융당국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

기업이 외부감사인을 자율적으로 6년 선임하면 다음 3년은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로부터 감사인을 지정받는 제도. 기업이 회계법인을 자율 선임하면 ‘갑을관계’가 만들어져 부실감사로 이어지는 현상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한국에만 있는 제도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