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평가된 우량주를 발굴해 끈기 있게 기다린 뒤 차익을 내는 가치투자 성향의 펀드들이 시련을 겪고 있다. 삼성전자를 앞세운 대형주 주도 장세부터 최근의 바이오·헬스케어주 ‘랠리’까지 가치주 펀드들이 좀처럼 반등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12~2014년 가치주 펀드 전성기에 이름을 날렸던 스타 펀드매니저들의 입지도 크게 위축되고 있다.
가치주펀드 매니저 '시련의 계절'
성과 부진에 설정액 급감

5일 펀드평가사 제로인에 따르면 가치주 펀드인 ‘KB밸류포커스’의 연초 이후 지난 4일까지 수익률은 9.03%에 그쳤다.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 상승률(22.15%)보다 훨씬 낮다.

이 펀드의 최근 3년 수익률은 9.14%다. 같은 회사의 ‘KB중소형주포커스’ 수익률도 올 들어 8.06%로 부진했다.

‘가치 투자의 대명사’로 통하는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부사장이 이끄는 펀드들도 고전하고 있다. 대표 펀드인 ‘한국밸류10년투자’는 올해 4.99%의 수익을 냈다. 올해 국내 공모펀드 가운데 신규 투자금을 가장 많이 유치한 ‘신영마라톤중소형주’ 수익률은 설정일(지난 7월24일) 이후 -0.35%다.

가치주 펀드의 전성기는 2012~2014년이었다. 2011년 ‘차화정(자동차주·화학주·정유주)’ 장세를 극복하고 2012년부터 매년 두 자릿수 이상의 수익을 냈다. KB중소형주포커스는 2012년부터 3년 동안 연평균 20.10%의 수익을 올렸다. 한국밸류10년투자도 같은 기간 연평균 13.72%의 성과를 냈다. 투자금이 몰리면서 펀드매니저들의 꿈인 ‘1조원 펀드(설정액 기준)’ 자리도 꾸준히 이어나갔다.

하지만 2015년 하반기부터 이어진 대형주 장세와 최근의 바이오·헬스케어주 상승세 속에 가치주 펀드는 힘을 잃고 있다. 대부분 지난해 마이너스 수익률을 냈으며 올 들어서도 코스피지수 상승률(지난 4일까지 22.15%)을 넘어선 펀드는 한 개도 없다. 1조원 펀드였던 KB밸류포커스(설정액 9027억원)와 한국밸류10년투자(7668억원), 메리츠코리아(9668억원) 등은 1조원 아래로 떨어졌다.

흔들리는 펀드매니저 위상

가치주 펀드매니저와 성장주 펀드매니저의 위상도 변화하고 있다. KB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이었던 최웅필 상무는 지난달부터 팀원 5명 규모의 밸류운용본부를 맡고 있다. 최 상무는 한국투자밸류운용 공채 출신으로 2009년 KB자산운용으로 이직한 뒤 간판 펀드인 ‘KB밸류포커스’ 등을 맡아왔다.

액티브운용1팀을 이끌었던 심효섭 이사는 상무(액티브운용본부장)로 승진해 나머지 팀을 이끌고 있다. 심 상무는 성장주 투자에 강점을 보이는 펀드매니저다.

KB자산운용 관계자는 “최 상무가 성과 부진 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안다”며 “직원 관리 부담을 덜고 운용에 좀더 집중하도록 조재민 KB자산운용 대표와 협의해 조직을 개편했다”고 설명했다.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의 창립 멤버인 김동영 자산운용2본부장은 지난달 회사를 그만뒀다. 김 본부장은 동원투신운용을 거쳐 2006년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출범 때부터 일한 창립 멤버로 “이채원 부사장의 가치투자 철학을 가장 잘 이해하는 펀드매니저”라고 알려졌다. 누적된 성과 부진이 결정적 원인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가치주 투자에 대한 부정적 전망도 나온다. 이정기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상장지수펀드(ETF)나 연기금 등 특정 지수나 벤치마크를 추종하는 성격의 자금 유입이 늘면서 수급이나 시가총액이 개별 종목의 성과를 결정하고 있다”며 “시가총액이 낮더라도 우량한 종목을 장기간 보유하는 가치투자 방식이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시장 상황은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만의 투자 스타일을 고수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는다. 한 가치주 펀드매니저는 “투자 사이클은 2~3년을 주기로 변하기 때문에 투자 철학을 고수하는 게 옳다”며 “단기 수익률만 좇는 투자 문화는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