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개입 자제가 원화강세 배경 중 하나"…올들어 달러 대비 12% 상승

한국 원화가 강세를 지속하는 것은 미국 재무부가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한 것을 우려해 정부 당국이 개입을 자제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된 때문이라고 월 스트리트 저널이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달러화에 대한 원화 가치는 올해 들어 최근까지 12% 오르면서 2년여 만에 최고치를 가리키고 있다. 이런 기세로 간다면 10여 년 만에 최대의 연간 상승폭을 나타낼 전망이다.

불안정한 지정학적 상황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 주식시장에 외국인 자금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 원화의 상승을 뒷받침하고 있다.

ANZ금융그룹의 데이터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자들은 두 달에 걸친 순매도를 마감하고 10월 한 달 동안 33억 달러의 한국 주식과 채권을 순매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성장률의 개선과 금리 인상 기대감, 달러화 약세 등도 원화가 강세를 보이는 배경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투자자들이 중요시하는 부분은 한국은행이 개입을 주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트럼프 눈치 볼 것"… 외국인 투자자 원화강세에 베팅
올해 내내 원화에 대한 매수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는 노이베르거 베르만의 프라샨트 싱 선임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한국은행이 종전처럼 시장에 개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원화 강세의 주요 동인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다.

일부 투자자와 애널리스트들은 원화 강세가 한국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더라도 한국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의 반감을 살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 개입을 꺼리는 한 가지 이유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부터 미국 재무부가 발표하는 환율보고서에 관찰대상국으로 포함돼 있는 상태다. 관찰대상국에는 중국과 일본, 독일, 스위스 등도 들어가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들은 관찰대상국 리스트가 외환시장 개입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외환시장을 담당하는 한은 고위 관계자는 인터뷰에서 "우리가 미세조정(스무딩 오퍼레이션)에 나설 때마다 관찰대상국에 올라있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면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UBS자산운용의 호르헤 마리스칼 신흥시장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이같은 발언이야말로 원화 가치의 추가 상승에 베팅하는 시장 참가자들을 안심시키는 주는 것으로, 한국은행이 외환시장의 흐름에 맞설 용의가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석했다.

마리스칼 CIO는 원화 매수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으며 달러화에 대한 원화 가치가 향후 12개월 동안 2% 가량 추가 상승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국 정부 측은 외환시장에 대한 개입을 자제함으로써 대만처럼 관찰대상국에서 제외되기를 희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 재무부는 지난해 10월 대만 중앙은행이 시장 개입을 줄였다는 이유로 이 나라를 관찰대상국에서 제외한 바 있다.

삼성선물의 전승지 애널리스트에 따르면 한국은행이 대규모의 시장 개입에 나선 것으로 추측되는 마지막 사례는 지난해 8월 16일 원화 강세를 늦추기 위해 최소 10억 달러를 매도한 것이었다.

외환 트레이더들은 한국은행의 다소 소극적인 자세는 신속하게 시장에 개입해 원화 상승에 제동을 걸었던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크레디트 스위스 그룹의 루치르 샤르마 아태 외환 트레이딩 부서장은 헤지펀드와 같은 전문적 투자자들 사이에서 한국 당국이 공격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진 것이야말로 자신들에게는 원화 베팅에 가담할 좋은 이유를 제공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