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고삐 풀린 듯 연일 하락세(원화 강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외환당국은 강한 대응에 나서지 않는 모습이다. ‘시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구두 개입성 발언을 되풀이할 뿐 외환당국의 시장 개입(달러 매수)은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게 외환시장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한 선물회사 관계자는 17일 “원·달러 환율이 장중 달러당 1100원 밑으로 떨어졌던 지난 16일엔 장 후반에 당국의 개입 물량이 약간 들어왔지만 오늘은 당국의 매수세가 강하지 않아 결국 종가도 1100원을 지키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시장에선 외환당국의 소극적인 움직임이 미국의 환율보고서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미 재무부는 작년부터 주요 교역상대국의 환율조작 여부를 조사한 보고서를 상반기(4월15일께)와 하반기(10월15일께) 두 차례 작성해 의회에 보고한다. ①200억달러를 초과하는 대미 무역수지 흑자 ②국내총생산(GDP) 대비 3%를 초과하는 경상수지 흑자 ③GDP 대비 순매수 비중 2%를 초과하는 환율시장 한 방향 개입 등 세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할 경우 해당 국가는 심층분석대상국(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된다.

한국은 작년부터 심층분석대상국 지정을 모면하고 줄곧 관찰대상국으로 분류돼 왔다. 대미 무역수지와 경상수지 흑자는 요건을 충족했지만 환율시장 한 방향 개입은 기준치에 미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가파른 환율 하락세에 대응해 외환당국이 강하게 시장 개입에 나섰다가 자칫 내년 4월 발표되는 환율보고서에 한국이 심층분석대상국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 은행계 외환딜러는 “원화 강세가 더 이어지더라도 당국은 최대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시장 개입 여부를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장 일각에선 정부가 내심 원·달러 환율 하락을 즐기고 있으며 환율이 추가 하락해도 이를 방치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마저 나온다. 문재인 정부가 기업의 수출과 투자 확대를 통한 ‘낙수효과’보다는 가계의 소비 여력을 직접 진작시켜 경제 성장을 유도하는 이른바 ‘소득주도성장’을 추진하고 있어서다. 원화가 강세를 보이면 수입 물가가 하락하고 원화의 구매력도 높아져 가계의 소득 진작 효과가 나타난다.

이에 대해 외환당국 고위 관계자는 “거시변수인 환율을 경제정책 실현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