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9월5일 오후 3시25분

한 달 거래규모 400조원에 달하는 국내 장외채권 중개업무를 놓고 한국거래소와 증권업계(금융투자협회)가 격돌하고 있다. 거래소가 증권사 브로커(중개인)의 ‘협의매매’ 역할을 PC로 대체할 수 있는 장내 전자거래 플랫폼(시스템)을 개발하고 서비스 확대를 추진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기술 발달과 글로벌 전자거래 확산이 주식시장보다 수십 년 길게 명맥을 유지해온 장외 채권시장의 존립을 위협하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채권시장 주류 ‘메신저 거래’ 위협

2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거래소는 새 채권 장내거래 플랫폼의 본격적인 서비스에 앞서 지난 6월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첫 설명회를 열었다. 최종 수요자를 전산으로 직접 짝지어주는 다양한 방법을 기술적으로 풀어내 궁극적으로 ‘협의매매의 장내화’를 이끌어낸다는 구상이다.

협의매매(RFQ·request for quote)란 특정 상품을 대규모로 매매할 때 상대방에게 호가를 요청하는 거래 방식이다. 국내 채권은 약 2만 종에 달하는 데다 원리금 지급조건도 다양해 주식처럼 경쟁호가 방식의 매매가 어렵다. 거래가 활발한 국고채 지표물(최근 발행물)을 뺀 대량 매매의 90% 이상이 브로커를 낀 협의매매로 이뤄지는 이유다.

새 플랫폼 이용이 늘어나면 국내 채권시장 생태계는 ‘인터넷 메신저’ 등장 이후 가장 큰 변화를 맞을 전망이다. 과거 1 대 1 전화통화로만 가능했던 채권 협의매매는 1990년대 후반 인터넷 메신저 보급으로 일대 변화를 경험했다. 수십, 수백 명의 채권시장 참여자들이 한 대화창에 모이는 가상의 공간들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미국 인터넷회사 야후의 메신저가 장기간 지배적인 플랫폼 역할을 했다.

국내 약 5000명의 채권시장 종사자들은 지난해 야후의 메신저 서비스(구버전) 종료 이후에도 여전히 메신저 대화를 기반으로 채권을 거래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가 야후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한 ‘K본드(옛 프리본드)’ 플랫폼에 모여 정보를 나누고 전화(또는 팩스)로 거래를 확정하는 형태다.

하지만 글로벌 규제 흐름은 장외거래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유럽은 장외 금융상품 거래를 투명성을 갖춘 플랫폼으로 옮기는 투자지침을 만들어 내년 1월부터 시행키로 했다. 시장 참여자들의 유착과 불투명성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다.

◆“알고리즘 고도화에 달려”

장내 전자거래는 호가를 모든 참여자에게 실시간으로 공개하고 전자 결제와 보고까지 동시에 이뤄져 투명성이 높다는 평가다. 저렴한 수수료도 강점이다.

하지만 증권업계 일각에선 장외 채권거래의 효율성이 높고 투명성도 충분한 상황에서 새 플랫폼이 혼란만 부추길 것이란 우려를 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는 K본드 플랫폼에서 나오는 호가를 실시간에 가깝게 홈페이지에 공시하고 있다. 증권사들은 전체 거래의 80%를 차지하는 장외 채권시장에서 연 2000억원 수준의 수수료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시장에선 메신저 거래에 익숙한 채권시장 참여자들이 단기간 내 전자거래로 이동하긴 어렵겠지만 기술의 고도화가 이뤄질수록 기존 장외시장의 입지는 좁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한 국내 자산운용사 채권펀드 매니저는 “지금보다 싼 비용에 거래가 가능한 플랫폼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며 “거래상대방과 적정가격을 편리하게 잘 찾아줄 수 있는 알고리즘이 발전할수록 장내거래의 매력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강영연/이태호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