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이분이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이 없는 건데 은혜를 몰라도 유분수지…. 모양은 사람인데 속에는 금수가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지난달 30일 서울 도봉 1동의 한 전신주 앞. 자그마한 키의 노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전신주에는 성인 키높이 정도에 ‘워커 대장 전사지’라는 금속 표지판이 붙어 있고, 그 위를 각종 광고 전단지가 덕지덕지 덮고 있었다. 표지판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 자리는 1950년 12월23일 오전 10시45분경 주한 미 8군 초대 사령관 월턴 해리스 워커 대장이 전사한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596-5번지이다. (중략) 이 전사지는 6·25 동족상잔의 비극을 조명하는 장소로 영구 보존해 우리 후세들에게 교훈으로 전하고자 한다.’

“이게 내가 2014년 5월에 18만원을 주고 만든 거예요. 이 자리는 사유지라 임의로 표지석을 세울 수 없어 한전에 협조를 구해 전신주에라도 표지판을 부착한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여기에다 광고지를 마구 붙여 놓으니 말이 됩니까. 워커 장군이 누구인지 안다면 절대로 그럴 순 없지요.”

열변을 토하는 사람은 김리진 워커대장추모기념사업회장(92)이다. 아흔을 넘은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목소리가 우렁차다. 김 회장은 40년 가까이 사재를 털어 워커 대장 추모사업을 벌이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는 잘 알아도 워커는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워커힐호텔, 워커전투화, 대구의 캠프워커(주한 미군 비행장), 부산 부경대의 워커하우스에 그의 이름이 남아 있지만 그러려니 할 뿐이다. 김 회장을 서울 방학동 주상복합 2층의 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채 10㎡도 안 되는 데다 ㄱ자로 꺾여 더 좁아 보이는 사무실엔 각종 자료가 여기저기 수북이 쌓여 있다. 벽에는 기념사업과 관련한 사진과 기사들로 도배를 하다시피했다.

▷워커 장군은 어떤 분입니까.

1950년 7월26일 대구 비행장에서 일본 도쿄로 출발하기 직전 기자회견을 하는 맥아더 장군(왼쪽)과 워커 장군. 
 한경DB
1950년 7월26일 대구 비행장에서 일본 도쿄로 출발하기 직전 기자회견을 하는 맥아더 장군(왼쪽)과 워커 장군. 한경DB
“월턴 해리스 워커 장군(1889~1950)은 6·25전쟁 때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을 낙동강 방어선(워커 라인)에서 목숨을 걸고 막아낸 분입니다. 포항 영천 대구 창녕 마산 통영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이 뚫렸으면 북한군이 부산까지 내려가는 건 시간문제였죠. 그러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는 겁니다. 그해 9월15일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도 못했을 것이고요. 그래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그를 ‘낙동강의 영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은인, 우리 모두의 은인입니다.”

▷어떻게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습니까.

“한마디로 죽기살기로 지켰습니다. 1950년 9월 낙동강 전선이 위태로울 때 부산에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나 태평양의 제3국 망명을 검토하고 있었고 육군본부도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그러나 워커는 미 8군사령부를 대구에 그대로 두면서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한국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스탠드 오어 다이(Stand or Die), 사수하느냐 죽느냐뿐’이라며 부하들을 독려해 방어선을 지켜낸 겁니다.”

▷전세가 절대적으로 불리하지 않았나요.

“워커 장군은 부임 직후 미 24사단장에게 곧 1기갑사단이 포항에 상륙할 테니 7월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며 적의 진군을 최대한 늦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죠. 워낙 급하게 참전한 데다 개전 초기 피해가 컸어요. 그래도 연합군의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려면 북한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켜야 했으니까 배수진을 친 겁니다. 밀리면 끝이었으니까요.”

워커 장군은 낙동강 전선을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장병들을 독려했다. ‘불독’ 같은 인상에 항상 철모를 쓰고 다녔다. 그가 탄 지프 뒤에는 30㎜ 기관총을 장착해 언제든 응사할 준비를 갖췄다. 지프 바닥은 강판으로 보강해 지뢰 폭발에도 대비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전선을 누비던 그는 1950년 12월23일 중부전선의 미 24사단 19연대와 영국군 27여단을 둘러보기 위해 의정부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서울 도봉동을 지날 때 반대편에서 내려오던 한국군 트럭과 충돌해 어이없이 운명했다. 그의 나이 61세였다. 이날은 함께 참전해 전방에서 싸우던 외아들 샘 워커 대위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직접 달아주러 가던 길이어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워커 장군 추모사업을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1987년 10월 열린 워커 대장 추모비 제막식.
1987년 10월 열린 워커 대장 추모비 제막식.
“저도 6·25전쟁에 참전했는데 1959년 대위로 전역한 뒤에도 먹고살기 바빠서 워커 장군은 생각하지 못했죠. 그러다 1970년대에 조경업을 하면서 돈을 좀 벌었어요. 번 돈으로 의정부, 연천 등지에 땅을 샀는데 많이 올랐고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마음이 안정되니 옛날 전장에서 처절했던 일과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은 기억을 정리하고 싶어졌어요. 그때 워커 장군을 생각하게 된 겁니다. 책도 찾아 보고 자료도 뒤지며 조사해 보니 맥아더 장군보다 더 높이 평가해야 할 인물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 고마움과 은혜를 갚고 있나, 추모비나 추모행사가 있나 알아 보니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도 개인이 나서서 추모사업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해야 합니다. 그게 사람의 도리 아닙니까.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풍요와 자유를 누리는 건 워커 장군이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낸 덕분입니다. 그런데도 전쟁 후 정부도, 군도, 기업도 그 누구도 그분의 은공을 기리지 않으니 부끄럽고 화가 났어요. 먹고살기 힘들 땐 그렇다 치더라도 경제력을 어느 정도 갖춘 뒤에도 나몰라라 하는 건 국가의 품격과 신뢰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나라도 나서서 국가의 체면을 세우자고 생각했죠. 그게 1979년 일입니다. 혼자서 추모기념사업회를 발기하고 설립했고, 그후로도 29년 동안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일했습니다.”

▷기념사업회를 발기하고 무슨 일부터 했습니까.

“전사한 자리를 찾는 것이었죠. 그래야 표지석이라도 세울 것 아닙니까. 그때부터 길고 긴 과정이 시작됐습니다. 미8군사령부와 군단사령부, 육군본부, 당시 사고 기사를 실은 신문사 등 수많은 곳을 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어요. 미국 국방부 전사실(戰史室)에 물어 보니 전사한 곳이 ‘서울 북방 11마일, 의정부 남방 6마일’ ‘서울 북방 7마일, 의정부 남방 6마일’이라고만 나올 뿐 정확한 좌표나 지명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트럭을 몰았던 한국군을 찾으면 알 수 있겠다 싶어 육군본부로, 춘천으로, 대전으로 쫓아다녔는데 1980년에 사망했대요. 허탈했죠.”

▷유력한 증인이 사라졌으니 막막했겠습니다.

“다행히 당시 민정당 국회의원이던 지갑종 유엔한국참전협회장이 미 국방부 자료실에서 사고 현장 사진을 구해줘서 사진에 나오는 지형과 물체를 찾아나섰어요.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였죠. 한미연합야전사령부의 데이비드 넥 대령을 통해 미 2사단 공병대의 지형 및 사진분석 전문가인 스독스 준위를 만나 서울과 의정부를 연결하는 국도의 지형을 샅샅이 분석했습니다. 그러던 중 열네살 때 사고 현장을 목격했다는 도봉구 주민의 증언을 확보해 지형을 대조해 보니 정확하게 일치하더군요. 그게 1986년 여름, 사고 지점을 본격적으로 찾아나선 지 3년4개월 만이었죠.”

천신만고 끝에 사고 지점을 찾긴 했으나 기념비도, 표지석도 현장에 세울 수 없었다. 국공유지가 아니라 민간인이 식당을 운영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대신 1963년 주한미군을 위한 위락시설로 지은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 언덕의 숲속에 추모비를 세우기로 했다. 워커 장군에 관한 기록을 김 회장에게서 넘겨받은 박정기 당시 한전 사장이 추모비 건립을 주도했고, 한미친선군민협회가 추모비를 건립한 것으로 돼 있다. 1987년 10월 열린 추모비 제막식에는 워커 장군의 아들이자 미국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샘 워커 예비역 대장이 참석했다. 김 회장은 이후 1991년부터 매년 12월 워커 장군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올해 추모 행사는 12월1일에 열린다.

▷전사지 표지석은 왜 2009년에야 세우게 됐습니까.

서울 도봉역 인근 워커 장군 전사지의 표지석을 둘러보는 김리진 회장(왼쪽).
서울 도봉역 인근 워커 장군 전사지의 표지석을 둘러보는 김리진 회장(왼쪽).
“추모비 제막식에 왔다가 떠나던 날, 샘 워커 대장이 그랬어요. 전사지는 역사적 장소인데 아무런 표시가 없어서 아쉽다고요. 그래서 내가 당장은 약속하지 못해도 죽기 전에는 세우겠다고 했죠. 1991년부터 2008년까지는 정말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혼자 추모행사와 추모사업을 해왔기 때문에 여력이 없었어요. 예전에 산 땅이며 별장도 다 팔고 사재도 다 털어 썼으니까요. 원래 자리가 아니라 다른 국공유지라도 좋으니 표지석을 세우게 해달라고 도봉구에 요청해 도봉역 인근에 세우게 된 겁니다.”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워싱턴DC의 미국 의회 귀빈식당에서 전·현직 대통령과 역대 주한미군사령관, 참전용사들을 초청해 워커 장군 추모제를 한 번 열었으면 좋겠어요. 돈이 많이 들겠지만 그러면 동포들이 미국에서 좀 가슴 펴고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한국은 은혜를 잊지 않는 나라라고, 누구든 도와주면 은혜를 갚을 것이고, 필요하면 우리도 도와줄 것이라고 자부하면서 말입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김리진 회장의 6·25 참전기
"처절했던 6·25 전투…꽁꽁 언 주먹밥 이로 갉아먹으며 싸웠죠"

육본 정보국서 박정희와 일하다 6·25 터지자 단화 신고 전장으로
적진 침투해 생포해온 일 생생해

낙동강전선서 북한군과 일진일퇴
'신출귀몰' 워커 장군 얼굴은 못봐

전쟁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드 배치는 작전지휘관 재량권…나라 지키겠다는 게 왜 문제인가"


김리진 워커대장추모기념사업회장의 인생은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명천이다. 할아버지가 조선 말기에 벼슬을 해서 괜찮게 살았다. 하지만 한일병합 후 할아버지는 러시아와 만주를 떠돌아다녀 집안을 돌보지 못했다. 두만강 인근 외가로 이사를 간 그는 강 건너 투먼의 상업학교에 다니다 일본 군대에 들어갔다. 해방이 되자 대학에 가겠다며 혼자 남쪽으로 내려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6년 8월 군에 입대했다. 미 군정청의 국방과 경비를 담당하는 통위부였다. 임시정부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렬 통위부장의 호위대장으로 발탁돼 1년 남짓 일하다 정부 수립 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일했다. 그는 박정희 전투정보과장 밑에서 서무반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다 6·25전쟁이 터지자 전투 현장에 투입됐다. 계급은 특무상사였다.

▷전선에 투입된 게 언제였나요.

“1950년 6월27일 서울 창동 초등학교 옆에 집결했어요. 전장에 나가는 군인이 철모가 아니라 정모를 썼고, 군화가 아니라 단화를 신었죠. 무기도 없었고요. 전쟁이 나니까 육본에서 2사단 소속으로 발령을 냈다가 나중엔 미 2군단 첩보대로 재편성했죠. 무기가 없으니 일단 후퇴해 한강을 겨우 넘어서 수원에 집결했다가 조치원으로, 경북 상주 북쪽 함창으로 작전상 후퇴를 계속했어요.”

▷육본 정보국의 다른 요원들은 어땠나요.

“문경전투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박정희 과장과 같은 차를 타고 이동하고 한 방에서 잤습니다. 소속 부대가 분산돼 다들 어수선했죠. 박정희는 말이 없고 엄격했어요. 대하기가 어려웠죠.”

▷첫 교전은 언제 벌였습니까.

“함창에서 문경전투에 투입됐습니다. 7월 하순쯤이었죠, 그때부터 무기가 공급됐거든요. 교전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죠. 적은 탱크를 갖고 오는데 우리는 없으니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제대로 훈련받은 사람도 없고, 장비도 없고, 전투 경험도 없고…. 적은 몇 년 전부터 훈련을 거듭해온 병력인데 말입니다.”

'92세 노병' 김리진 워커대장추모기념사업회장 "잊혀진 6·25 영웅 워커…그가 없었다면 대한민국도 없었겠죠"
▷낙동강 전선에서도 싸웠겠군요.

“문경에서 다부동까지 한 20일 걸렸던 것 같아요. 또 작전상 후퇴를 해서 다부동에 배치됐죠. 그땐 적과 아군의 거리가 능선과 능선 사이니까 200~300m에 불과했어요. 소총의 유효사거리(400m) 이내여서 머리만 들면 쏘곤 했죠. 그러다 명령이 떨어지면 팔공산에 투입돼 부상한 미군을 야간에 업고 내려오는데 덩치가 얼마나 큰지…. 저는 첩보부대 소속이라 경찰까지 지휘했어요. 팔공산까지 병력을 배치해 놓으니 거리가 200~300m나 돼요. 양쪽 끝을 오가며 지휘하다 보면 병력이 없어졌어요. 도망간 거죠. 원용덕 대구 위수사령관이 왔기에 비오는 날인데 칼빈총을 던지며 울부짖었어요. 이게 뭐냐고.”

상황이 급해지자 미8군도 부산으로 이동했다. 김 회장은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 없었지만 8군의 가장 소중한 장비가 통신장비인데 그걸 지금의 부경대, 옛 수산대학에 옮겼다”고 했다. 지금도 부경대에 워커하우스가 있는 이유다. 미군은 일본에 있던 B29를 96대나 출격시켜 800~900t의 폭탄을 왜관에 퍼부었다. 그야말로 융단폭격이었다. 왜관을 뚫고 대구를 점령하려다 실패한 북한군은 의성, 신령 쪽으로 공격했다. 영천 쪽이 급해졌다. 김 회장은 “영천에서 하양으로 넘어오는 고개가 있는데 거기를 아침이면 우리가 들어가고 해가 져서 미군의 폭격이 중단되는 밤이면 북한군이 점령하기를 일곱여덟 번이나 했다”며 치열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워커 장군과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 계셨네요.

“그렇죠. 다부동전투가 가장 중요할 때였으니까. 난 못 봤지만 워커 장군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가 있는 곳을 왔다갔다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땐 워커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자세히는 몰랐죠.”

▷인천상륙작전 후에는 어디까지 올라갔습니까.

“강원 김화, 경기 이천, 황해도 곡산 등으로 북진을 계속해서 성천, 신성천, 개천, 북개천, 희천, 묘향산 등으로 진군했죠. 그땐 제가 국군 2군단 첩보부대 3지대 소속으로 주로 유격전을 벌였는데, 평양과 원산의 중간쯤 되는 성천에 적의 패잔병이 재집결해 아군을 공격하니 이걸 막고 치안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1개 소대 병력이 450명의 치안대 병력을 지휘하며 원산~평양 간 연결 통로를 확보했죠. 전쟁에는 앞뒤 척후조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다들 집에 가면 귀한 자식이니 언제나 제가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는 어디였나요.

“중공군의 포위작전으로 손실된 수색대를 보충하기 위해 보병 6사단 수색대 소대장으로 전속됐을 때였습니다. 1950년 12월21~23일쯤이었죠. 안성 죽산을 거쳐 백암리의 작은 마을에 배치됐는데 사단 정보참모가 1~1.5㎞ 거리를 두고 대치 중인 적이 중공군인지 인민군인지 파악해야 하니 적진에 침투해 적병을 산 채로 끌고 오라는 겁니다. 성공하면 1계급 특진과 훈장을 준다면서요. 작전 참가 병력은 저를 포함해 5명. 작전은 새벽 4시에 개시하기로 했죠. 초저녁에 작전 지역 인근에 도착한 우리는 들판의 볏짚에 몸을 숨긴 채 꽁꽁 언 주먹밥을 갉아먹으며 기다렸어요. 마침 흰 옷으로 위장한 적병 하나가 큰길로 오길래 내가 중국말로 ‘누구야’ 하니 이쪽이 중공군인 줄 알고 ‘인민유격대야’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콰이라이(빨리 오라)’고 해서 적을 생포하는 데 성공했죠. 물론 특진과 훈장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요.”

▷다치지는 않았나요.

“1951년 6월 경기 가평을 탈환하고 화천발전소에 들어가려고 야간에 능선을 따라 이동하다 바위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습니다. 몸을 전혀 쓰지 못한 채 석 달간 후송치료를 받았는데, 그때 상관이던 박정희에게 연락하니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더군요. 그날 자기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자고 가라고 해서 다다미가 깔린 남산의 옛 일본군 관사에서 하루 신세를 지기도 했습니다. 육영수 여사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인데 저녁상을 들고 들어오는데 육 여사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어요. 제가 너무 수줍음을 타서요. 하하.”

▷그렇게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데 나중에 좀 안 챙겨주던가요.

“제가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이에요. 군대에서도 누가 저한테 돈봉투를 갖다 주면 도로 혼을 냈죠. 또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차 없이 체벌 하곤 했습니다.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도 그중 하나였는데, 그런 일로 앙심을 품고 제가 박 전 대통령에게 접근하는 걸 막았죠. 저보다 한 살 아래인 종필이(김종필 전 총리)도 육본 정보국에 갔을 때 만났는데 잘못하면 용서 안 했죠. 종서 종익 종락 종필 종관 등 5형제 이름을 다 외울 정도로 JP는 잘 알죠. 저는 남들이 집을 사서 제대할 때 빈손으로 나왔어요. 그러니 지금도 워커 장군 추모행사 때 200~350명씩 오죠. 제가 남의 이름 팔아서 나쁜 짓 하면 오겠습니까.”

▷6월입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전쟁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전쟁은 참혹하고 처절하고 냉정한 것입니다. 시대마다 모두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시대의 사명을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는 것으로 감당했듯이 지금 사람들은 지금 시대의 사명을 다해야죠.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는 작전지휘관의 재량권에 속하는 겁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데 뭐가 문제인가요. 그걸 왜 공개해서 이 난리들인지 알 수 없어요.”

노병의 나라 걱정엔 끝이 없었다. 불리하면 언제나 뒤집어버리는 공산주의와는 어떤 약속도 협상도 필요 없다며 북한을 능가할 수 있는 고도의 전략과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강조했다. “모든 국민은 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겁니다. 저도 그랬고 여러분도 그래야 합니다.”
'92세 노병' 김리진 워커대장추모기념사업회장 "잊혀진 6·25 영웅 워커…그가 없었다면 대한민국도 없었겠죠"
"워커 장군의 3성계급장…추모사업 이을 누군가에게 물려줄 것"
김리진 회장의 가보


1987년 10월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 경내에 세워진 월턴 해리스 워커 장군 추모비 제막식에는 그의 외아들인 샘 워커 부부가 참석했다. 아버지와 함께 6·25전쟁에 참전한 샘 워커는 당시 대위로 중부전선을 누볐다.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미국으로 운구하라는 지시를 거부하며 끝까지 적과 싸우겠다고 고집하다 맥아더의 ‘명령’을 듣고서야 운구에 나섰다. 장례식이 끝난 뒤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된 워커 장군은 대장으로 추서됐다. 아들 샘 워커도 최연소 대장으로 진급해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부자가 함께 대장이 된 건 미군 사상 최초라고 한다.

추모비 제막식에 참석한 샘 워커 장군이 김리진 워커대장추모기념사업회장에게 귀한 선물을 전했다. 아버지가 6·25전쟁 때 달고 다닌 3성(星) 계급장을 감사패에 박아서 건넨 것. 이 계급장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이젠하워 장군(전 미국 대통령)이 전차군단장 조지 패튼 장군에게 직접 달아준 것으로, 1945년 워커 장군이 중장으로 진급하자 패튼은 이 계급장을 달아줬다. 감사패를 선물로 받을 때 이런 사실을 몰랐던 김 회장은 “계급장에 담긴 사연을 나중에야 알고 가보처럼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김 회장은 이제 이 계급장을 물려줄 사람을 찾고 있다. 지금까지 혼자 힘으로 워커 기념사업을 끌고 왔지만 나이가 있는 만큼 이젠 접어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그렇다고 기념사업을 중단하는 건 나라의 체면을 깎고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기에 누군가 나서서 이 일을 맡아줬으면 좋겠다”며 “국가관이 바로 서 있고, 은혜를 은혜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계급장과 함께 기념사업을 맡기고 싶다”고 했다.

워커 장군의 스토리를 영화로 만드는 일도 추진되고 있다. 김 회장은 “지난 3월 미국에서 작은 대학 총장으로 있는 사람이 워커 장군 얘기를 영화화하고 싶다고 해 자료 제공에 동의했다”며 “워커 장군을 알리는 것은 곧 한국을 알리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워커대장 추모사업 연혁

▷1979년 추모기념사업회 설립
▷1986년 전사 장소 확인
▷1987년 추모비 건립. 제막식에 샘 워커 대장 참석
▷1991년 전사 41년 만에 첫 추모제 거행. 알링턴국립묘지 참배
▷2009년 전사 장소 인근에 표지석 설치
▷2010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추모제 거행
▷2013년 추모식에 워커 대장 손자 2명 참석
▷2014년 전사 장소에 표지판 부착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