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본 인수합병(M&A)으로부터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공시의무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자본 M&A란 속칭 ‘기업사냥꾼’이 자기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대출을 받아 상장기업 최대주주 지분을 사들이는 거래를 말한다.

4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한 달간 ‘최대주주 변경을 수반하는 담보계약’ 공시를 제때 하지 않아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됐거나 지정이 예고된 회사는 알파홀딩스 세미콘라이트 빛과전자 에이티테크놀러지 소리바다 등 5개에 달했다. 이들 회사는 새로운 최대주주가 된 인수인이 매입 예정인 주식을 담보로 대출받아 인수자금을 마련했거나, 기존 최대주주가 경영권이 바뀔 정도로 많은 주식담보 대출을 받아놓고서 이 사실을 바로 공시하지 않았다.

지난 8월8일 알파홀딩스의 최대주주가 된 프리미어바이오는 당시 인수대금 가운데 85억9000만원을 알파홀딩스 주식을 담보로 한 차입금으로 조달했다. 하지만 한 달 반이 지난 9월28일에야 이 사실을 밝혔다. 담보권이 실행되면 프리미어바이오의 알파홀딩스 지분율은 4.9% 수준으로 급락한다.

세미콘라이트의 이전 최대주주였던 지케이티팜은 담보권이 실행돼 경영권이 넘어간 뒤에야 이 같은 계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8월2일 이 회사의 최대주주가 된 지케이티팜은 당시 인수자금 전량을 세미콘라이트 주식을 담보로 외부에서 조달했다. 하지만 돈을 갚지 못하면서 채권자인 갤럭시인베스트먼트가 지난달 2일 담보로 잡고 있던 주식을 전량 매도했다. 세미콘라이트의 최대주주는 지난달에만 두 차례 변경되며 시장 불확실성을 키웠다.

거래소는 무자본 M&A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투자자에게 알리기 위해 지난해 9월 ‘최대주주 변경을 수반하는 담보계약’ 공시를 신설했다. 공시를 제때 하지 않거나 누락하는 회사는 거래소로부터 벌점을 부과받는다. 벌점이 15점을 넘어가면 관리종목으로 지정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무자본 M&A는 경영권이 쉽게 바뀌기 때문에 주식 투자자들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경영권을 인수한 최대주주가 아니라 해당 기업이 제재를 받는 구조이다 보니 적극적인 공시를 이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