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 남동쪽의 스타이브샌트타운. 3만2000㎡(약 1만평) 땅에 110개동의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뉴욕 최대 아파트 단지다. 작년 여름 이 단지가 매물로 나오자 뉴욕에 사무실을 둔 글로벌 기관투자가의 합종연횡이 시작됐다. 덩치가 큰 매물인 만큼 신디케이션(여러 투자자가 돈을 모아 투자하는 것)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운용사의 등장에 모든 논의가 중단됐다. 세계 최대 사모펀드(PEF) 블랙스톤이었다. 블랙스톤은 단일 단지로는 미국 부동산 거래 사상 최고가인 54억5000만달러(약 6조5000억원)에 스타이브샌트타운을 사들였다. 지난달 뉴욕에서 만난 한 기관투자가는 “블랙스톤이 나타나면 웬만한 기관은 검토하던 투자를 아예 포기해버리는 일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글로벌 투자전쟁 격전의 현장을 가다] 슈퍼 파워 PEF…블랙스톤·칼라일 뜨면 웬만한 큰손은 꼬리 내려
슈퍼 사모펀드의 시대

블랙스톤 같은 글로벌 사모펀드 운용사의 힘이 갈수록 세지고 있다. 탁월한 투자 성과를 바탕으로 세계 연기금·국부펀드의 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다. 막대한 운용자산으로 전 세계의 좋은 투자 기회를 선점하고 이를 지켜본 기관투자가가 더 많은 돈을 맡기면서 운용자산이 계속 불어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됐다.

블랙스톤은 2014년 11월 일곱 번째 바이아웃(경영권 인수)펀드 투자자 모집을 시작했다. 작년 5월 1차 모집 완료 때까지 40개국에서 250개 기관투자가가 157억달러를 위탁했다. 사상 최대 수준이었다. 블랙스톤 관계자는 “돈을 맡기겠다는 투자자를 대거 돌려보내고도 180억달러의 펀드 조성을 최근 완료했다”고 말했다. 블랙스톤의 운용자산(AUM)은 작년 3분기 기준으로 3340억달러(약 400조원)에 달한다.

블랙스톤뿐 아니다. 경쟁사인 칼라일,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 KKR, TPG도 운용자산이 각각 1877억달러(약 225조원), 1620억달러(약 195조원), 987억달러(약 118조원), 702억달러(약 84조원)에 이른다. 이들 5대 사모펀드의 운용자산을 모두 합하면 8526억달러로 경제 규모 세계 17위인 터키의 국내총생산(GDP) 7525억달러를 훌쩍 뛰어넘는다.

80년대 잭 웰치 능가하는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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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돈이 몰리자 사모펀드들은 경영권을 인수해 기업 가치를 높인 뒤 되파는 바이아웃펀드 위주에서 부동산펀드, 인프라펀드, 헤지펀드 등 다른 대체투자 전략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블랙스톤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주택 가격이 급락하자 부동산펀드를 통해 5만채의 주택을 사들인 뒤 미국 최대 주택 임대업체로 변신한 게 대표적이다.

바이아웃펀드의 규모가 커지면서 경영하는 기업 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운용자산 기준 세계 2위 사모펀드 칼라일은 운용인력이 약 700명에 불과하지만 전 세계에서 투자한 200여개 기업이 고용한 임직원 수는 65만명에 달한다. 삼성그룹이 세계에서 고용하고 있는 직원 약 50만명보다 많다. 구스타보 슈워드 뉴욕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뉴욕이나 런던 사무실에 앉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백개 투자 기업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며 “전방위로 사업을 확장했던 제너럴일렉트릭(GE)의 잭 웰치 전 회장보다 영향력이 더 센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뒤바뀐 갑을 관계

유럽 최대 사모펀드 CVC는 최근 15년 만기에 목표 내부수익률(IRR)이 연 12~14%인 바이아웃펀드를 조성했다. 보통 바이아웃펀드의 만기가 10년, 목표 IRR이 20%인 점을 고려하면 펀드에 돈을 넣는 기관투자가에 훨씬 불리해진 조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펀드에는 유럽 바이아웃펀드 사상 최대 규모인 45억달러가 몰렸다. 연기금, 국부펀드 등 기관투자가의 돈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수익을 조금 덜 얻더라도 안정적으로 돈을 맡길 곳이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한 기관투자가는 “사모펀드 운용사(GP)와 펀드 투자자(LP) 간 갑을 관계가 뒤바뀌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신문·등산복·햄버거…사모펀드 없인 하루도 못 살죠

모처럼 여유로운 주말 아침. 눈을 뜨자마자 신문(신문용지 생산업체 전주제지의 최대주주는 사모펀드인 모건스탠리PE)을 읽는다. 등산복(네파·MBK파트너스)을 입고 뒷산을 가볍게 산책한다. 점심은 스마트폰 앱(배달의민족·골드만삭스PIA)에서 배달시켜 해결하고 오후에는 대형마트(홈플러스·MBK파트너스)에서 장을 본다. 저녁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부대찌개(놀부·모건스탠리PE)를 먹을지, 햄버거(버거킹·보고펀드)를 먹을지 고민하다 부대찌개로 결정했다. 커피전문점(할리스·IMM PE)에서 디저트를 즐기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한국도 사모펀드가 투자한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는 하루를 보내기 어려운 나라가 됐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미국계 사모펀드들이 국내에 상륙한 지 19년, 2004년 토종 사모펀드를 육성하기 위해 사모투자전문회사 제도를 도입한 지 12년 만이다. 한 대형 사모펀드 대표는 “투자한 기업이 늘어나다 보니 아들이나 조카를 취직시켜달라는 청탁이 쇄도해 일을 못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드라이파우더와 사모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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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총과 대포로 전쟁하던 19세기까지 병사들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화약을 건조한 상태로 유지하는 일이었다. 화약이 젖어 있으면 총이나 대포도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건조된(dry) 화약(gun powder)을 뜻하는 ‘드라이파우더’는 그래서 전투에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실탄을 의미했다. 최신식 전투기와 장갑차가 등장한 20세기부터 드라이파우더라는 말은 전장에서 사라졌다. 대신 사모펀드가 투자자로부터 모은 투자금 중 아직 투자를 집행하지 않은 금액, 즉 사모펀드의 실탄을 뜻하는 은어로 사용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프레킨에 따르면 작년 9월 말 현재 세계 사모펀드들이 보유하고 있는 드라이파우더는 1조3200억달러. 우리돈 약 1580조원으로 사상 최대다. 벤처캐피털 등을 제외한 순수 바이아웃(경영권 인수) 펀드의 드라이파우더만도 4806억달러(약 577조원)에 달한다.

뉴욕=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