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1월3일 오후 4시5분

[마켓인사이트] '조기상환' 옵션 붙은 영구채, 비우량기업 '분식' 수단 전락?
재무구조가 나쁜 기업들의 영구채권(신종자본증권) 발행이 잇따르고 있다. 발행 금액을 전액 자본으로 회계처리할 수 있는 이점을 이용해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다.

3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작년 11월과 12월 두 달 동안에만 국내 기업 다섯 곳이 명목 만기 30년짜리(발행회사의 선택에 따라 연장 가능) 영구채를 발행했다. CJ건설(발행금액 500억원), CJ푸드빌(500억원), 풀무원식품(100억원), 한국스마트카드(500억원), 대한항공(3억달러) 등 재무구조가 좋지 못한 곳이 대부분이다.

CJ건설은 2014년 말 기준 부채비율이 500%가 넘고, CJ푸드빌은 완전 자본잠식 상태다. 대한항공은 작년 9월 말 현재 부채비율이 1000%를 웃돈다.

IB 업계는 “이들 기업이 명목 만기와 별도로 발행기업 선택에 따라 영구채를 일찍 상환, 투자자들이 얻을 수 있는 ‘조기상환선택권(콜옵션)’ 행사가능 시점을 2~3년으로 짧게 설정함으로써 단기 고수익을 좇는 투자자들을 끌어들여 발행에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CJ건설은 지난달 23일 500억원의 영구 전환사채(CB)를 연 3.62% 금리로 발행하면서 발행 2년 뒤 조기 상환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CJ푸드빌과 풀무원식품, 한국스마트카드, 대한항공은 3년 뒤 조기 상환할 수 있는 권리를 넣었다. 그동안 국내 은행이나 우량기업 영구채의 콜옵션 행사 시점이 5년 또는 10년인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으로 짧다는 평가가 많다.

투자자들이 재무구조가 나쁜 기업 영구채에 장기간 투자하기를 꺼리다 보니 우량기업들과 같은 구조로 발행하는 게 불가능했다는 설명이다.

한 보험사 채권 운용역은 “영구채들은 통상 ‘불가피한 상황만 아니라면 콜옵션을 행사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바탕으로 발행한다”며 “2~3년짜리 콜옵션이 붙은 영구채는 명목 만기가 얼마든 상관없이 본질적으로는 같은 기간의 고금리 회사채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IB 업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유상증자 등 실질적인 재무안정성 개선 노력 없이 손쉬운 ‘분식(粉飾)’ 수단으로서 영구채를 남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용평가사들은 발행 2~3년 만에 상환 예정인 영구채에 대해서는 자본성을 조금이라도 인정하기 어렵다고 평가하고 있다. 자본 인정의 핵심 요건 중 하나가 충분히 긴 시간 동안 상환부담 없이 현금을 사용할 수 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신평사들은 콜옵션 행사가능 시점이 2~3년부터 시작되는 영구채에 대해서는 회사채로 간주하고 신용등급을 산정한다는 방침이다.

바젤은행감독위원회도 ‘5년 내 상환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을 영구채 자본 인정 요건에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제회계기준(IFRS)은 ‘만기 시점에 의무적으로 현금 상환해야 하는’ 조건이 없으면 영구채의 자본 회계처리를 인정하고 있다.

한 신용평가사 관계자는 “IFRS가 영구채를 거의 무조건적으로 자본으로 인정한 2012년 당시부터 부실 기업들의 분식 수단 활용은 예견됐던 일”이라고 말했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