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퇴직연금 '공격투자 시대'] 연금상품 '원금보장형'서 '실적배당형'으로…"연 10조 증시 이동할 것"
앞으로 개인연금과 퇴직연금 가입자들은 은행 보험 증권사 등 금융회사가 제시하는 연금 상품의 조건을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가입자가 별도로 어떤 자산에, 얼마만큼을 투자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으면 금융회사들이 정한 대표상품(주식 채권 등)으로 자금이 들어갈 수 있어서다.

◆한국에도 ‘401K’ 효과 기대

금융회사들이 자동투자 옵션(default option)으로 제시할 대표상품은 국내외 주식과 채권 등을 고루 담은 자산 배분형 상품일 가능성이 크다. 기대 수익률이 원금 보장형 상품보다 높지만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국면엔 손실을 볼 가능성도 있다. 시장 변화에 따른 위험을 감수하기 싫은 투자자들은 채권 중심의 안전한 상품에 자금을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좋다. 금융회사가 제시한 대표상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산별 배분 비중을 조정해 줄 것을 요청해야 한다.

원금 보장형 연금 상품에 익숙한 투자자가 많은 한국에 자동투자 옵션, 금융회사별 대표상품 제도 등을 도입하기로 한 배경은 저금리 기조에 있다. 2007년만 해도 시중 예금 금리가 연 5~6%에 달했지만 현재는 연 1.6% 수준까지 내려왔다. 원금 보장형 상품만으론 물가상승률을 따라가기도 버거워졌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내년 1분기 중 금융투자업감독 규정을 바꿔 원금 보장 신탁의 신규 가입을 금지할 계획”이라며 “금융회사들이 적극적으로 실적 배당형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연금 제도의 변화가 국내 주식시장 체질을 바꿀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국내 근로자의 노후자금이 자연스럽게 증시로 흘러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매년 최소 10조원 안팎의 자금이 국내 증시로 이동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개인·퇴직연금 등 사적연금 적립액이 400조원에 달하고 해마다 30조~40조원의 자금이 새로 들어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 분석이다. 미국 증시에서도 자동투자 옵션을 갖춘 퇴직연금인 ‘401K’를 도입한 뒤 지수가 큰 폭으로 뛰었다. 퇴직연금이 처음 출범한 1981년 2000포인트에 불과하던 미국 다우존스산업지수는 20여년 만에 17,000포인트까지 올랐다.

존 리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는 “한국 증시가 중장기적으로 박스권을 돌파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배경 중 하나가 주식시장 대기자금 성격을 띤 풍부한 사적 연금 때문이었다”며 “연금을 주식에 투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자리잡으면 한국 주식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사들의 ‘진검승부’ 예고

증권가에선 연금제도 변경에 따라 어떤 종목이 유망한지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매년 2~4% 수준의 배당금을 받을 수 있는 배당주의 몸값이 올라갈 것으로 보고 있다.

증권업종의 단기 강세를 점치는 전문가도 많다. 자동투자 옵션 도입으로 주식 거래가 활발해지면 증권업종이 혜택을 볼 것이라는 논리다.

서동필 흥국증권 투자전략 담당 이사는 “연금 상품을 취급하는 은행이나 보험사들도 주식을 사려면 증권사 창구를 이용해야 한다”며 “증권사들의 주식 중개 수수료 수익이 큰 폭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연금 상품을 판매하고, 운용하는 금융회사들의 경쟁도 한층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앞으로는 금융회사별 수익률 격차가 크게 벌어질 수 있어서다. 성인모 금융투자협회 연금실장은 “대표상품의 수익률을 기준으로 금융회사를 고르려는 움직임이 한층 더 뚜렷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형 증권사들은 일임형 퇴직연금 시장에서 맞부딪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연금 랩어카운트’ 같은 일임형 연금 상품에 펀드와 똑같은 세제혜택을 줄 계획이다.

■ 자동투자 옵션

default option. 연금 가입자가 특정 운용방식을 지정하지 않으면 금융회사가 자체적인 투자 전략에 따라 사전에 정한 모델 포트폴리오와 대표 상품(주식, 채권)에 자동으로 투자하는 제도다. 미국, 칠레, 호주 등에서 시행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가입자 나이에 따라 운용방법이 바뀌는 ‘타깃데이트펀드(TDF)’ 등의 상품을 주로 활용한다.

송형석/이유정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