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11월2일 오후 4시43분

‘SK텔레콤 승리-MBK파트너스 패배’로 결말이 난 CJ헬로비전 매각은 지략과 술수, 환호와 탄식이 교차하는 기업 인수합병(M&A) 전쟁의 냉혹성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국내 최대 사모펀드(PEF)인 MBK 측은 당초 2조원짜리 투자회사 씨앤앰을 SK 측에 팔기 위해 수차례 협상을 통해 거래구조와 가격 수준까지 어느 정도 합의해둔 터였다. 이 와중에 SK 측이 지난달 30일 느닷없이 씨앤앰 대신 경쟁사인 CJ헬로비전을 인수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MBK 측은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 있느냐”는 격한 반응도 나왔다.
[마켓인사이트] MBK 울린 '배신의 빅딜'…정글로 가는 M&A
(1) 환호·탄식 교차하는 반전 또 반전

SK텔레콤, 사모펀드 MBK와 씨앤앰 인수협상 주춤하자
2주만에 CJ헬로비전 인수
MBK “약혼날짜 잡아놨는데 신부(씨앤앰)보다 미인인
여성(CJ헬로비전)이 나타나 신랑(SK)을 채갔다” 한탄


경쟁사 또는 인수후보자들의 의표를 찌르는 거래는 숱하게 많다. 기존 M&A의 통념과 관행을 깨는 파격이 연출되기도 한다. CJ그룹이 케이블TV 자회사인 CJ헬로비전을 SK텔레콤에 매각한다는 내용을 발표하자 SK 측의 인수자문을 맡은 모건스탠리를 제외한 다른 투자은행(IB) 업체들은 땅을 쳤다.

한 관계자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창의적인 거래”라고 아쉬워했다.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지만 막상 성사되고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오는 거래라는 얘기다.

CJ헬로비전은 올 상반기 말 현재 시장점유율 29%, 가입자 수 416만여명의 국내 최대 케이블TV 사업자다. 케이블TV사업의 성장성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지난 3년 동안 해마다 1021억~1493억원의 영업이익을 벌어다준 알짜회사다. tvN 등 CJ E&M 계열사들이 제작한 방송 콘텐츠를 시청자와 연결하는 플랫폼이자 알뜰폰 시장 1위 업체이기도 하다. 국내 최대 미디어·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성장해나가는 CJ그룹이 이처럼 전략적 가치가 높은 계열사를 팔 것이라는 예상은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난달 중순까지 속도를 올리던 MBK파트너스와 SK텔레콤 간 협상이 CJ 측을 극도의 긴장으로 몰아넣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SK는 이번에 CJ헬로비전을 인수하기 전에 3위 케이블TV 업체인 씨앤앰 인수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지난 8월 말 네이트를 운영하는 SK컴즈를 내주는 대신 씨앤앰의 미디어·엔터테인먼트 계열사인 IHQ의 2대주주가 되기로 하면서 이미 첫 단추를 끼운 상태였다.

미디어사업 자회사인 SK브로드밴드가 씨앤앰을 인수하면 SK그룹은 단순 합산으로 자산 규모 5조5000억원의 초고속인터넷 2위, 시내전화 2위, IPTV 2위, 케이블TV 3위 방송·통신 자회사와 방송 콘텐츠 생산 계열사를 모두 거느리게 된다.

이 경우 직격탄을 맞을 기업은 CJ였다. CJ헬로비전과 CJ E&M의 자산을 합쳐도 4조4000억원 수준으로 SK에 미치지 못했다. 반면 씨앤앰을 품은 SK는 CJ엔 없는 무선이동통신과 인터넷 플랫폼까지 갖추게 될 것이었다.

CJ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씨앤앰을 인수한 SK가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시장을 접수하는 것을 바라보느냐, 아니면 1위 계열사(CJ헬로비전)를 내주고 SK와 전략적 협력관계를 구축하느냐의 기로였다. SK와의 협상을 ‘다된 밥’으로 보고 최종 사인만 기다리던 MBK 측은 CJ의 이런 고민을 새까맣게 몰랐다.

지난달 중순 CJ가 SK에 전격 매각 제의를 하자 양측의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SK로선 CJ헬로비전이 씨앤앰보다 나은 매물이었다. 시장점유율 16%, 가입자 238만여명의 3위 업체 씨앤앰을 인수하는 덴 최소 2조원이 필요했다. 반면 CJ헬로비전의 인수가격은 1조원이었다. 절반값으로 1위 사업자를 살 수 있는 마당에 이런 거래를 마다할 기업은 없었다.

MBK 측 협상 관계자가 “약혼날짜까지 잡아놨는데 신부(씨앤앰)보다 미인인 여성(CJ헬로비전)이 나타나 신랑(SK)을 채갔다”고 한탄한 이유다. 7년여 만의 투자금 회수 기회도 물건너가 버렸다.

(2) 누구든 사고, 무엇이든 판다

삼양사, 사모펀드 앞세워 효성 알짜 매물 사들여
KT렌탈 관심 없다던 롯데, 막판에 경쟁사 따돌려


이 같은 양상이 잦아지면서 요즘 국내 M&A 시장에는 이른바 ‘신사도’가 사라졌다는 얘기가 많이 나돈다. 지난해 롯데그룹과 삼양사가 각각 오릭스 프라이빗에쿼티(PE)와 스탠다드차타드(SC) PE를 앞세워 현대로지스틱스와 효성그룹 패키징 사업부를 인수한 것도 IB업계에 회자되는 사례다. 롯데와 삼양사는 현대와 효성이 물류 및 포장재 경쟁사인 자신들에 자회사를 매각하길 꺼리자 몰래 PEF를 앞세워 사들이는 전략을 폈다. 효성은 뒤늦게 실질적인 인수자가 삼양사란 사실을 알고 한때 거래 파기를 선언할 정도로 격앙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올초엔 렌터카업계 1위 KT렌탈(현 롯데렌탈)을 두고도 치열한 수싸움이 벌어졌다. 매각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상당수 인수후보들은 “과연 KT가 업계 1위를 달리는 알짜 계열사를 팔겠느냐”며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당시 롯데그룹은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철저한 연막작전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막상 입찰함 뚜껑을 열고 보니 최고가를 써낸 곳은 호텔롯데였다. 당초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SK그룹과 한국타이어 등은 고배를 마셨다. 외국계 증권사 대표는 “요즘 M&A에 임하는 기업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전략은 실리”라며 “아무리 알짜회사라도 ‘선택과 집중’ 전략에서 배제된 계열사는 과감하게 매물로 내놓고, 반대로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할 수 있다면 어떤 회사라도 살 수 있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3) 오너들이 M&A판 직접 짠다

SK 최태원·롯데 신동빈 회장, CJ·삼성과 잇따라 빅딜


예상 밖의 빅딜이 연달아 터지는 원인을 ‘오너의 귀환’에서 찾기도 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최 회장은 지난 8월 경영에 복귀한 지 두 달여 만에 CJ와의 빅딜을 성사시켰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회장 취임 이후 미국 뉴욕 유학 시절 눈여겨봐둔 뉴욕팰리스호텔을 인수한 데 이어 삼성그룹으로부터 삼성SDI 케미컬사업부와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 등 화학계열사를 한꺼번에 사들이는 빅딜을 단행했다.

오너 경영자들이 기존 ‘컬러’를 과감하게 바꾸는 점도 M&A 시장을 더욱 혼전으로 몰아가는 요인이다. 두산그룹은 건설중장비 생산 계열사인 두산인프라코어의 공작기계 사업부문을 팔아 소비재사업인 면세점 진출을 꾀하고 있다. CJ헬로비전을 매각한 CJ가 가전렌털업체 코웨이 인수전에 뛰어든 것도 B2B(기업 간 거래)에서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로 사업 다각화를 확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IB업계 관계자는 “산업계 전반에 구조조정 및 사업재편 바람이 불면서 오너들이 직접 M&A 판을 짜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