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PEF)의 미투자 자금이 지난달 처음으로 20조원을 넘어섰다. 통상 기업을 인수할 때 전체 자금의 절반가량을 대출로 조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수합병(M&A) 시장에 40조원가량의 금융자본이 대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괜찮다’ 싶은 매물에는 인수 경쟁자들이 몰리고, 대상 기업의 몸값이 치솟아 자칫 ‘승자의 저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사모펀드 20조 '낮잠'…MBK마저 1년8개월째 M&A '빈손'
○PEF ‘장롱 자금’ 20조원 돌파

29일 투자은행(IB) 업계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PEF 전체 누적 조성액은 54조1000억원으로 집계된 가운데 미약정 잔액은 20조6000억원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PEF 자금 중 아직 집행하지 않은 실탄을 의미하는 ‘드라이파우더(dry powder)’가 20조원을 넘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체 PEF 중 미투자 금액 비중은 2013년 말 36.2%에서 지난해 말에는 37.9%로, 올 6월에는 38.1%로 확대됐다. 저금리에 갈 곳을 못 찾은 기관 자금이 앞다퉈 PEF 분야에 흘러들어오면서 PEF 덩치가 커지고 있지만 드라이파우더의 증가 속도가 더 빠르다는 얘기다.

미투자 금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유는 경기불황과 주요 제조업종의 실적 악화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동안 주요 투자 대상으로 꼽히던 스마트폰 부품, 자동차 부품, 철강·조선 기자재 업체들이 업황 부진에 시달리다 보니 PEF들도 섣불리 지갑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

공무원연금공단은 지난해 말 PEF 운용사 세 곳에 총 600억원의 자금을 맡겼지만 8개월여가 지난 지금 실제 투자 자금은 유니슨캐피털이 공차코리아를 인수하는 데 쓴 25억원이 전부다.

○넘치는 유동성에 치솟는 몸값

간간이 나오는 유망 매물은 경쟁입찰에서 해외 PEF와 국내외 대기업들이 공격적인 가격을 써내는 바람에 국내 PEF들이 인수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이다. 올 상반기 국내 기업 매각 상위 10건(매각가 기준) 중 국내 PEF가 사들인 사례는 IMM프라이빗에쿼티의 태림포장 인수 건 하나밖에 없다.

동양생명(인수자 중국 안방보험) 현대증권(일본 오릭스) 티켓몬스터(미국 KKR) 등은 외국계 PEF에, KT렌탈(롯데) 팬오션(하림) 등의 인수전에서는 대기업에 밀렸다.

국내 1위 PEF 운용사인 MBK파트너스도 번번이 인수경쟁에서 고배를 마시고 있다. 2013년 말 ING생명을 인수한 이후 투자 실적은 ‘제로’다. 하반기 최대 매물로 꼽히는 홈플러스 인수전도 MBK파트너스를 제외하면 칼라일,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 골드만삭스PIA, KKR 등 외국계 PEF들의 독무대가 되고 있다. 한 PEF 업계 대표는 “대형 PEF나 중견 중소 PEF 모두 눈에 불을 켜고 투자 대상을 찾고 있다”며 “때문에 대형 매물은 물론 중소형 투자시장에까지 몸값 거품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자칫 부실투자로 이어져 향후 투자원금을 회수하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연기금의 PEF 담당자는 “투자 대상을 찾지 못한 PEF들이 초조함에 바이오 헬스케어 화장품 등 일부 업종에 몰려들면서 기업 가치를 지나치게 높이고 있다”며 “회수 시점에서 수익성 악화 우려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