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의도 금융가 ‘술렁’ > 국내 신용평가회사들이 기업 신용등급을 부당하게 조율한 뒤 평가계약을 따낸 사실이 금융감독원에 적발됐다는 소식이 17일 알려지면서 신용평가사들이 모여 있는 서울 여의도 금융가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한경DB
< 여의도 금융가 ‘술렁’ > 국내 신용평가회사들이 기업 신용등급을 부당하게 조율한 뒤 평가계약을 따낸 사실이 금융감독원에 적발됐다는 소식이 17일 알려지면서 신용평가사들이 모여 있는 서울 여의도 금융가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한경DB
마켓인사이트 6월17일 오후 5시7분

H사가 A신용평가회사에 ‘등급 상향’을 요청한 것은 올초였다. 수개월 뒤 발행할 회사채의 금리를 낮추기 위해 ‘사전 정지작업’을 한 것이다. H사는 A신평사로부터 등급 상향 약속을 받아낸 뒤 이번엔 B신평사와 C신평사를 압박했다. “등급을 올려주는 곳에 평가업무를 맡기겠다”는 엄포에 다른 두 신평사도 일제히 등급을 올려줬다. H사는 모든 신평사로부터 높은 등급을 받은 덕분에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하는 데 성공했다.

◆“좋은등급 줄테니 일감 달라”

[마켓인사이트] 신용평가사, CP 발행 후로 등급 강등 미뤄…투자자들 '날벼락'
회사채 발행을 앞둔 기업의 ‘등급 쇼핑’과 신평사의 ‘등급 장사’ 의혹이 금융감독원 검사 결과 일부 사실로 확인되면서 회사채 시장 전반에 상당한 충격이 예상된다. ‘신용을 잃은 신평사’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근본부터 뜯어고쳐야 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부실평가’한 신평사에 대한 소송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투자은행(IB) 업계에선 신평사와 기업이 유착관계에 빠지게 된 것은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기업은 높은 신용등급을 받아야 낮은 이자율로 자금을 빌릴 수 있고, 신용등급 평가수수료로 먹고사는 신평사는 기업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IB 관계자는 “신평사 입장에선 엄정하게 평가해야 할 대상이 회사의 ‘목줄’을 쥔 고객이란 모순적인 상황에서 일하는 셈”이라며 “최근 몇년 사이 힘의 균형이 기업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자 기업이 ‘갑’이 되고 신평사는 ‘을’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채 발행을 준비하는 기업은 신평사 3사 중 2개사에서만 신용등급을 받으면 되는 만큼 특정사를 배제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갖게 된다. 그러다 보니 신평사가 먼저 기업에 접근해 “좋은 등급을 줄테니 일감을 달라”고 요구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국내 신용평가 시장이 나이스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등 3대 신평사의 과점체제로 이뤄진 것도 신평사와 기업 간 유착에 한몫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814억원 규모인 국내 신용평가 시장은 나이스신평(33.9%) 한기평(32.8%) 한신평(33.2%)이 비슷한 규모로 나눠 갖고 있다. 치열한 점유율 경쟁이 신평사들을 ‘일감수주’ 쟁탈전으로 몰아넣는다는 분석이다.

◆‘신용등급 인플레’에 영향줬나

업계에선 신평사와 기업 간 유착관계가 ‘신용등급 인플레’ 현상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 가운데 A등급 이상을 받은 업체 비중은 77.4%였다. 10곳 중 7~8곳이 우량등급 판정을 받은 것. 2003년 A 이상 등급 비중이 41.7%였던 점을 감안하면 10년 만에 두 배 가까이 상승한 셈이다.

국내 주요 증권사 채권 발행 담당 임원은 “신평사가 기업 등급을 마구잡이로 올리다 보니 투자자 입장에선 A등급 회사채도 불안하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B증권사 채권 애널리스트는 “모건설사의 경우 신용등급이 부풀려진 사실을 채권시장 관계자들이 모두 안다”며 “기관투자가들은 실제 이 회사 채권을 거래할 때는 한 단계 낮은 등급으로 간주하고 거래한다”고 설명했다.

신평사와 기업 간 검은 커넥션으로 피해를 본 투자자들이 금감원 검사 결과를 토대로 신평사에 소송 등을 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선 부실평가로 확인된 기업의 등급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업계 관계자는 “투자자 입장에선 신평사가 신용등급을 올려준 탓에 실제보다 비싼 가격(채권금리가 낮아지면 채권가격은 높아짐)에 채권을 매입한 셈이 됐다”며 “금감원 검사 결과가 발표되면 회사채 시장에 상당한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오상헌/하헌형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