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경제민주화 역풍…M&A시장 대기업 실종, 사모펀드만 독주
마켓인사이트 3월27일 3시15분

국내 대기업들의 인수합병(M&A) 투자가 얼어붙고 있다. 대기업들이 올 들어 M&A에 투자한 것은 모두 6595억원(4건)에 그쳤다. 2012년 1분기 투자 규모인 2조464억원(12건)의 4분의 1 수준이다.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있는데다 사회적 화두로 등장한 ‘경제민주화’가 대기업들의 투자욕구를 위축시킨 게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대기업의 투자가 급속히 줄어든 것과 반대로 사모펀드(PEF)는 역대 최대 규모인 32조원의 자금을 확보, M&A시장이 PEF 주도로 재편되고 있다.

◆대기업, 투자 손놨다

27일 한국경제신문이 올해 1분기 주요 M&A 거래를 분석한 결과 발표(본계약 또는 잠정협약 체결) 기준으로 PEF들이 국내 기업에 투자한 규모(50억원 이상, 부동산 제외)는 11건 2조8099억원으로 집계됐다. 같은 기간 대기업(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의 기업 인수 규모는 4건 6595억원에 그쳤다.

PEF의 건별 평균 투자 규모는 2554억원으로 대기업(1648억원)을 크게 앞질렀다. 올 들어 ADT캡스가 2조원의 가격에 칼라일에 팔렸고, 보고펀드는 에누리닷컴을 인수했다. 또 IMM은 현대상선 신항만과 티브로드에 각각 3150억원, 2000억원을 투자했다.

대기업 중에서는 레이크사이드CC를 인수한 삼성물산과 나노H2O를 인수한 LG화학, NSOK를 사들인 SK텔레콤 정도만 굵직한 M&A에 나섰을 뿐이다.

이는 대기업이 활발하게 거래를 주도하던 2~3년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당시 하이닉스, 대한통운, 하이마트, 현대건설 등 대형 물건은 대부분 대기업 차지였다. 대기업의 M&A 투자는 2012년 6조6213억원(19건)으로 PEF의 6조2120억원(22건)을 앞질렀다.

2012년 1분기만 해도 국내 대기업은 12건 2조464억원어치의 기업을 사들였다. 긴자스테파니(LG생활건강 인수), 알파나테크놀로지(삼성전기), 로이힐광산(포스코) 등 해외 투자에도 거침이 없었다. 이 기간 PEF의 투자 건수는 8건 4515억원으로 대기업의 5분의 1 수준에 그쳤었다.

그러나 경제민주화의 위세가 등등하던 작년엔 대기업의 투자가 5조8182억원(11건)으로 감소, 6조8918억원(43건)을 투자한 PEF에 역전됐다. 올 들어서는 27일 현재 대기업의 투자 규모는 PEF의 25% 선으로 떨어졌다.

◆PEF만의 기형적 시장

IB(투자은행) 전문가들은 PEF의 M&A시장 주도가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무엇보다 SK, CJ, 삼성, 롯데 등 그동안 인수 시장을 주도하던 대기업들이 숨을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의 M&A를 문어발식 확장으로 보는 비판적 인식이 경제민주화 논리를 타고 확산됐다”며 “대기업의 M&A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를 의식한 대기업들이 투자보다는 사업 부문 매각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임석정 JP모간 대표는 “글로벌 기업들이 M&A로 경쟁력을 높여가는 흐름 속에서 국내 대기업들만 소외되고 있는 양상”이라며 “지금의 투자 축소가 2~3년 뒤 글로벌 경쟁의 승부를 결정하는 변수가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PEF의 실탄은 눈덩이처럼 쌓이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국내 PEF 조성 규모는 44조원으로 이 중 28조원이 투자됐다. 앞으로 쓸 수 있는 자금이 16조원이라는 얘기다. 기업을 인수할 때 통상 자금의 절반가량을 타인 자본으로 조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PEF가 M&A에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은 32조원에 달한다.

한영투자연구소 이상현 대표는 “PEF는 투자 후 매각으로 차익을 얻는 구조이기 때문에 대기업의 투자가 위축되면 M&A시장은 활성화되기 어렵다”며 “PEF만 투자하는 기형적 구조로는 한국 M&A시장이 계속 발전하기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