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이사의 두 얼굴] 출석률 0% '유령 이사'…78개사 94명 "바빠서 못 나갔다"
인쇄회로기판(PCB) 제조회사인 심텍은 지난해 이사회를 21번 열었다. 하지만 사외이사 3명 중 2명은 단 두 차례 참석하는 데 그쳤다. 회사 관계자는 “사외이사들이 엔지니어 출신이어서 설비투자 안건이 있을 때만 참석했기 때문”이라며 “자사주 처분 안건을 처리할 때 굳이 나올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사외이사제도는 경영진을 견제·감시하기 위해 1998년 도입됐다.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유명무실한 제도로 운영하고 있는 회사가 많다. 이사회에 출석하지도 않는 ‘유령 사외이사’를 재선임하는가 하면, 회사와 거래관계가 있어 부적격자로 지목되는 사람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회사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일부 주인 없는 회사에서는 사외이사들이 권력집단화돼 경영진을 쥐락펴락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출석 한 번 없는 ‘유령 사외이사’ 넘쳐

[사외이사의 두 얼굴] 출석률 0% '유령 이사'…78개사 94명 "바빠서 못 나갔다"
안병엽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작년 3월 코스닥 상장사 시공테크의 사외이사가 된 뒤 아홉 차례의 이사회 중 딱 한 번 참석했다. 시공테크 관계자는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 참석하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동녕 서울대 명예교수(일진디스플레이)와 전원책 전 자유기업원장(한빛소프트) 역시 이사회 참석 횟수가 단 한 차례에 그쳤다. 이트론의 사외이사 4명 전원(중도퇴임자 포함)은 ‘출석률 0%’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 같은 ‘유령 사외이사’ 사례는 차고 넘친다. 한국경제신문이 유가증권시장 500개와 코스닥시장 500개 등 1000개 상장사를 조사한 결과 78개사에서 94명의 사외이사가 지난해 이사회 ‘출석률 0%’를 기록했다.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대원전선)과 부장판사 출신인 박해식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제이콘텐트리)도 이 대열에 포함됐다.

이처럼 출석률이 낮은데도 재선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시공테크와 일진디스플레이, 제이콘텐트리는 안 전 장관과 이 명예교수, 박 변호사를 올해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김영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출석도 하지 않은 사외이사를 재선임한 건 ‘회사 경영을 함께 고민할 파트너’가 아닌 ‘등기임원 명부에 이름을 빌려줄 사람’을 찾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거수기’ 역할에 만족하는 사외이사도

이사회에 참석한 뒤 무조건 찬성표를 던지는 ‘거수기’ 사외이사의 실상도 드러났다. 조사 결과 지난해 상장사 1000개의 사외이사들이 반대표를 던진 안건은 단 5건에 불과했다. 특히 10대 그룹 소속 91개 상장사의 사외이사 341명이 던진 반대표는 단 2건에 그쳤다. 경험과 식견에 바탕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함에도 대부분 사외이사는 경영진이 만든 안건에 ‘찬성표’만 던지는 거수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S사의 한 사외이사는 “이사회 개최 직전에 안건을 통보받기 때문에 검토할 여력이 없다”며 “경영진이 ‘어련히 잘 판단했겠지’란 생각으로 동의해 주곤 한다”고 말했다.

거수기 논란은 선임과정의 독립성 문제에서 출발한다. 많은 기업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람만 사외이사로 뽑고 있어 독립적인 의사결정이 힘들다는 얘기다. 롯데쇼핑의 경우 올 정기주총에서 선임할 4명의 사외이사 후보 중 3명이 부적격자라는 게 좋은기업지배연구소의 판단이다. 계열사 임원 출신이거나 회사와 거래관계가 있는 법조인이라는 점 등이 이유다. 신한금융지주도 9명의 사외이사 후보 중 5명이 대주주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후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영진 쥐락펴락 ‘그림자 권력’ 노릇도


그런가 하면 금융회사 공기업 등 ‘주인 없는 회사’에서는 사외이사들이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강원랜드 사외이사 7명이 2012~2013년 네 차례에 걸쳐 부실기업 오투리조트를 지원토록 해 회사에 150억원의 손실을 입힌 게 대표적이다. 감사원 관계자는 “당시 실무진들이 오투리조트의 회생 가능성이 낮다며 여러 차례 반대의견을 냈지만 사외이사 7명이 똘똘 뭉쳐 밀어붙였다”며 “지원금 전액이 회수불능 상태라 사외이사들을 배임 등의 혐의로 검찰에 통보조치했다”고 말했다.

권력집단화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KB금융 사외이사들은 경영진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ING생명 인수를 막판에 무산시키는 ‘힘’을 과시했다. 당시 경영진은 ‘너무 비싸다’는 사외이사들의 지적에 따라 협상을 통해 매수가를 낮췄지만 사외이사들의 무더기 반대표에 뜻을 접어야 했다.

농협금융의 ‘우리투자증권 계열 3사’ 인수작업 지연도 매각사인 우리금융지주 사외이사들의 반대 때문이다. 우리금융 관계자는 “사외이사들이 배임 논란을 과도하게 의식해 무조건 매각조건을 개선할 것을 주장해 가격협상이 삐걱대고 있다”고 전했다.

‘그림자 권력’ 논란이 일면서 ‘사외이사 중도사퇴’라는 새로운 풍속도도 등장했다. 이영남 이지디지털 대표와 배재욱 변호사는 임기가 남은 KB금융 사외이사에서 자진해 물러났다. 당사자들은 ‘본업이 바빠서’라지만, 사외이사 내부의 갈등과 권력집단화를 비판하는 시선에 부담을 느꼈다는 분석이다.

오상헌/조진형/김일규 기자 u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