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증권시장 상장사 경방의 지분 약 1.5%를 갖고 있는 슈퍼개미 김기수 씨는 최근 사재 5000만원을 경방 근로복지기금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자전거 제조업체 참좋은레져의 2대주주(지분율 12.27%)인 박영옥 씨는 ‘자전거 붐’을 일으킬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한 끝에 나온 “산 좋고 물 좋은 지역을 2박3일 동안 자전거로 둘러보는 여행상품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최근 회사 측에 건넸다. 모든 슈퍼개미가 경영진과 갈등을 빚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을 통해 단기 시세차익을 노리는 슈퍼개미는 소수다. 상당수는 투자한 기업의 ‘실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돼 자연스럽게 주가가 오르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경영진이 행여 잘못된 길로 빠지는지를 감시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기 일처럼 협력하기도 한다.

마켓인사이트 3월13일 오전 10시42분

○‘상생 슈퍼개미’도 등장

김씨가 경방 직원들을 위해 사재를 털게 된 배경은 이렇다. 그는 작년 3월 경방 주총에서 액면분할을 제안했다. 적은 유통주식 수가 주가 상승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당시 경방 주식의 하루 거래량은 1000주에도 못 미쳤다. 회사 측은 유통물량 확대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약속했고, 9개월 뒤인 작년 12월에 주당 0.2주의 무상증자 계획을 발표했다.

약속을 지킨 회사 측에 감동한 김씨는 고마움을 표시할 방법을 찾았고, 결국 자신이 새로 받게 될 주식의 10%가량을 직원들을 위해 쓰기로 결정했다.

김씨는 “슈퍼개미도 주요 주주로서 회사 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근로복지기금 출연처럼 일회성 이벤트를 넘어 지속 가능한 상생 모델을 개발하는 방안도 찾고 있다”고 말했다.

2010년 쌍용머티리얼에 30억원가량을 투자해 2년여 만에 3배 가까운 수익을 낸 한세희 씨도 비슷한 케이스다. 한씨는 지난해 쌍용머티리얼 투자로 큰 재미를 보자 “주주들을 위해 땀흘려 일한 근로자들은 별로 얻은 게 없다”며 자신이 보유한 회사주식 10만주(2억6950만원 상당)를 직원들 계좌에 직접 넣어줬다. 근로자 1인당 평균 357주씩 받았다.

2007년 일성신약 지분 5% 이상을 취득하는 등 슈퍼개미로 이름을 날렸던 표형식 씨도 당시 배당으로 받은 돈의 상당부분을 중·고교 등에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슈퍼개미 덕분에 기업가치 재발견

슈퍼개미는 ‘소외주’들이 재평가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로만손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슈퍼개미 정성훈 씨가 로만손에 주목한 건 2009년. 시계가 전부였던 로만손에 ‘J.에스티나’란 보석·가방 브랜드가 더해지면서 외형과 내실이 한층 탄탄해지는 걸 목격한 직후였다. 로만손 주식을 조금씩 매입하던 정씨는 작년 3월 지분율을 8.57%로 끌어올리며 주요 주주로 등장했다. 매입단가는 주당 3000원대였다.

정씨는 “보석과 가방 부문의 성장세를 감안하면 2~3년 후 로만손의 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커질 것”이라며 “경영진의 열정과 능력 덕분에 회사가 성장하고 있는 만큼 우호적인 경영 참여를 모색하기 위해 지분을 취득했다”고 밝혔다.

정씨를 만난 로만손은 날아올랐다. 3000원대였던 주가는 작년 10월 1만5100원으로 5배 가까이 상승한 뒤 현재 8000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1222억원)과 영업이익(81억원)은 2011년보다 각각 17.5%와 29.5% 늘어났다. 현재 로만손 지분을 10.26% 보유한 정씨는 로만손의 가치를 시장에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정씨가 주요주주로 참여한 뒤 1년 동안 로만손의 주가가 2~3배 상승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며 “확실하게 시장의 재평가를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기업 성장의 파트너 된 슈퍼개미

기업 경영진에 슈퍼개미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대부분 기업들이 슈퍼개미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거나 ‘힘’(표 대결)으로 제압하는 방식을 택하는 이유다.

하지만 의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업체 태평양물산의 경영진은 달랐다. 주요주주로 참여한 슈퍼개미의 제안을 적극 수용하는 등 기업 경영의 파트너로 대우함으로써 회사를 한층 더 발전시켰다.

‘주식농부’ 박영옥 씨가 태평양물산 주주명부에 이름을 올린 건 2010년 5월. 박씨는 5.35%를 보유하고 있다고 신고한 뒤 추가 매집을 통해 지분율을 16.4%까지 끌어올렸다. 지분이 늘자 보유 목적도 ‘단순투자’에서 ‘경영참여’로 바꿨다. 그리곤 회사에 문제점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박씨는 “영업은 잘되는데 이익이 나지 않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수차례 태평양물산을 방문해 최대주주인 임석원 대표 등을 만났다.

임 대표 등 태평양물산 경영진은 회사 상황을 수시로 박씨에게 설명하는 등 경영 파트너로 대접했다.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유휴 부동산을 팔고 해외 생산거점 효율화 작업을 펼치는 등 박씨의 제안을 상당부분 받아들였다. 작년에는 150억원 규모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발행하면서 신주인수권(워런트) 일부를 임 대표와 함께 박씨에도 배정했다. 기업이 BW를 발행하면서 일반 주주에게 워런트를 넘기는 건 매우 드문 케이스다. ‘슈퍼개미와의 동행’은 실적 개선과 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박씨가 처음 지분 취득 공시를 했던 2010년 3000억원 수준이던 이 회사 매출은 지난해 5000억원대로 올라섰다. 당기순이익은 적자에서 90억원 흑자로 전환됐다. 1만원을 오르내리던 주가는 4만원 수준으로 뛰었다. 김기수 씨와 경방의 관계도 비슷하다. 경방의 오너 형제인 김준 사장과 김담 부사장은 지난해 김씨와 따로 만나 회사 현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기도 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슈퍼개미들은 장기간에 걸친 투자를 통해 여러 기업들의 경영활동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네트워크도 쌓는다”며 “상장사들이 건전한 슈퍼개미들을 기업 경영의 동반자로 인정할 경우 든든한 원군을 얻은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안재광/오상헌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