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orld Bank) 춘계 총회가 끝나자마자 ‘베를린 컨센서스’ 철회 문제를 놓고 유럽 위기의 최후 보루 역할을 맡고 있는 독일과 IMF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다.

어떤 국제현안에 대한 특정국의 일관된 입장을 의미하는 컨센서스는 그동안 ‘워싱턴 컨센서스’와 ‘베이징 컨센서스’가 널리 알려졌다. 전자는 주요 국제현안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후자는 중국의 입장을 의미한다. 경제학적인 의미보다는 주로 세력 확장과 관련해 국제정치학적인 의미로 더 많이 사용돼 왔다.

같은 맥락에서 ‘베를린 컨센서스’란 당면한 유럽위기 해결책 등과 관련해 그동안 독일이 취해온 일관된 입장을 말한다. 논리는 간단하다. 유럽위기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경기부양보다 긴축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위기발생국의 도덕적 해이를 줄이면서 재정여건을 개선, 균열된 유럽통합을 재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 독일의 주장이다.

유럽위기가 발생한 지 2년이 되는 시점에서 IMF가 느닷없이 독일에 ‘베를린 컨세서스’ 철회를 권고한 것은 이전의 사례를 보면 자명해진다. 4년 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 직면하자 미 학계를 중심으로 위기해결 정책 기조를 ‘긴축’과 ‘부양’ 가운데 어느 쪽으로 선택할 것인가 논란이 벌어졌다.

특히 재정 분야에서 ‘로코프 독트린’과 ‘크루그먼 독트린’ 간 논쟁은 유명하다. ‘로코프 독트린’이란 재정적자가 확대되면 신용등급 추락 등과 같은 신뢰위기에 봉착하고, 재정지출을 통한 부양대책은 ‘구축효과(crowding out effect)’로 경기가 의도했던 대로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근거에서 나온 주장이다.

하지만 금융위기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아 재정적자 축소에 우선순위를 두면 1930년대 대공황 때처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 것이라고 반박한다. 오히려 재정지출을 통해 경기를 부양한다면 누진적 조세구조를 갖고 있는 국가일수록 재정수입이 늘어 재정적자를 축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 ‘크루그먼 독트린’이다.

한때 세계 최고의 경제학과 자리를 놓고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 간 자존심 싸움으로 비유됐던 이 독트린 논쟁에서 재정정책 주무부서인 오바마 정부가 손을 들어준 것은 ‘크루그먼 독트린’이다. 출범 이후 오바마 정부는 금융위기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재정정책의 우선순위를 경기부양에 두면서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

IMF가 ‘베를린 컨센서스’ 철회를 들고 나온 또 다른 이유는 유럽위기를 풀기 위해서는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간의 조화가 중요하다는 점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중앙은행 목표는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있다.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통화론자들은 ‘천사와의 키스’만 할 것을 주장하면서 물가안정 이외 다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악마와의 키스’라고 할 정도로 금기(taboo)로 여겨왔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글로벌화되고 시장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물가는 점차 안정되고 있다. 날로 격화되는 경쟁을 이기기 위해 최종상품의 가격파괴 혹은 인하를 의미하는 ‘월마트 효과’가 보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물가가 불안하다고 한다면 중앙은행이 설정한 물가목표 상한선을 벗어나는 정도다.

전반적으로 물가가 안정된 시대에 중앙은행은 물가안정만을 고집하기보다 성장과 고용, 위기극복 등과 같은 다른 목표를 추진해야 한다. ‘악마와의 키스’가 ‘천사와의 키스’로 대접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의미다. 벤 버냉키 미 중앙은행(Fed) 의장은 중앙은행이 ‘물가목표제(inflation targeting)’뿐 아니라 ‘성장목표제(growth targeting)’ ‘고용목표제(employment targeting)’를 함께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이 같은 맥락에서 통화정책을 추진해 왔다.

한때 인플레이션 악몽에 시달렸던 유럽 중앙은행들은 전통적으로 물가안정에 주력해 왔다. ‘유럽위기’라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전임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물가를 잡겠다고 작년 7월 말까지 기준금리를 올려왔다. 결과적으로 이런 경직된 통화정책 운용이 유럽위기를 2년 이상 지속시킨 주범이라는 것이 IMF의 진단이다.

뒤늦긴 했지만 마리오 드라기 현 총재가 취임한 이후 통화정책 기조가 ‘경기부양’을 우선하는 쪽으로 급선회됐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추진됐던 두 차례 금리인하와 장기대출프로그램(LTRO)이 대표적이다. ECB의 통화정책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베를린 컨센서스’가 철회돼 재정정책도 ‘경기부양’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는 것이 IMF의 논리다.

자존심 강한 독일이 ‘베를린 컨센서스’를 철회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최근 IMF의 권고에 근거가 되는 일련의 정책을 먼저 추진했던 미국은 금융위기가 이제 출구전략을 논할 만큼 빨리 극복되고 경기도 회복되고 있다. ‘베를린 컨센서스’가 철회된다면 세계 증시에 초대형 호재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벌써부터 형성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