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은 한국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의 하나다. 한국은 무역 의존도가 80%를 넘는 수출 중심 경제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하반기 불거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던 데는 환율 효과에 따른 수출 증가가 큰 힘이 됐다.

올해는 각국이 환율 문제를 놓고 어느 때보다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미국은 막대한 무역적자를 보고 있는 중국을 상대로 위안화 절상을 요구하는 총공세를 펼쳤다. 중국 등은 달러를 풀어 경기를 부양시키는 미국을 강하게 비판했다. 쏟아지는 유동성 유입을 막고 적절한 환율을 유지하려는 규제 역시 봇물을 이뤘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환율전쟁이 내년에도 이어지면서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환율전쟁 불씨 여전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환율전쟁은 최근 소강 상태를 보이고 있다. 위안화 절상을 끈질기게 요구하던 미국의 목소리가 잠잠해지자 중국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환율과 관련해 큰 목소리를 내던 독일 일본 등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휴전이 가능해진 계기는 지난달 열린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다. G20 정상들은 미국이 요구한 '경상수지 가이드라인'을 내년 상반기까지 구체화하기로 합의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적정한 경상수지 규모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환율 역시 적정 수준으로 가져가야 한다.

하지만 글로벌 환율전쟁 '휴전'은 일시적일 공산이 크다. 경상수지 가이드라인 설정 작업이 본격화하기 시작하면 주요국들이 서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힘겨루기를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 중국 등 각국의 입장은 바뀐 것이 없다.

내년 G20 의장국인 프랑스는 국제금융체제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미국 달러화 중심의 기축통화 체제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경기를 살리게 한다는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정책을 펴고 있는 미국을 비판하는 국가들이 많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내년 환율전쟁이 더 격화할 가능성이 높다. G20 준비위원회 관계자는 "서울 회의에서는 환율 문제를 푸는 방향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을 뿐"이라며 "본격적인 환율전쟁은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내년에 시작될 것"으로 내다봤다.


◆확대 팽창 지속될듯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등 선진국들은 내년에도 시중에 돈을 푸는 양적완화 정책을 계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지난달부터 제2차 양적완화 정책에 들어갔다. 내년 6월 말까지 8개월간 6000억달러(매월 750억달러)의 국채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시중에 돈을 풀 계획이다. 이것도 모자라 3차 양적완화 정책을 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벤 버냉키 FRB 의장은 이달 초 달러 추가 매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지난 9월 25억유로 규모의 국채를 매입했다. 또 고정금리로 금융사들이 원하는 만큼 무제한 자금을 공급하는 대출 기한을 연장했다. ECB는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영국 역시 지난달 국채 매입 한도를 종전 수준인 2000억파운드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국채 · 기업어음 · 회사채 매입을 통해 5조엔을 추가 공급하고,기존 은행권에 대한 고정금리 대출 프로그램도 30조엔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거시경제연구부장은 "최근 유럽 재정위기가 부각되면서 달러화가 다소 강세를 보인 것이 그나마 주요국의 환율 갈등을 막아주고 있다"며 "하지만 달러가 다시 약세로 돌아설 수 있다고 보고 각국이 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본 유출입 규제 잰걸음

미국이 3차 양적완화를 실시한다면 갈등은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각국은 미국의 저금리 정책과 통화 팽창으로 흘러들어오는 외국 자본 유입을 막기 위한 조치들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은행세(bank levy)로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들은 내년에 도입하기로 확정했다. 은행세는 금융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는 동시에 금융회사의 과도한 외화 차입을 막기 위한 조치다.

한국도 선물환 포지션 규제와 외국인 채권투자 과세 부활에 이어 최근 '거시건전성 부담금'이라는 이름의 은행세를 매기기로 했다. 연평도 포격 등으로 여건이 좋지 않지만 급격한 외화 유입이 원화 가치를 비정상적으로 상승시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판단했다.

한국 정부는 새로운 자본 유출입 규제는 내놓지 않겠지만 기존 선물환 포지션 규제는 더 강화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당장은 외화 유입으로 증시 상승 등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일시에 빠져나갈 경우 엄청난 충격을 받을 수 있다"며 "환율이 경제 펀더멘털을 제대로 반영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